히피문화의 상징인 꽃과 사이키델릭 록 음악

히피문화의 상징인 꽃과 사이키델릭 록 음악
히피문화의 상징인 꽃과 사이키델릭 록 음악

히피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Love and peace, 사랑과 평화의 상징물이 바로 꽃입니다. 이 꽃은 전쟁의 포화를 만드는 총, 폭탄에 대한 상대 개념이거든요. 스콧 메켄지의 유명한 히피 곡인 샌프란시스코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첫 번째 가사가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라는 가사가 들어있죠. 그것처럼 샌프란시스코와 연결되는 꽃은 누가 들어도 히피와 연결된 곡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피문화의 상징인 꽃

이렇게 히피의 핵심적인 상징물 중의 하나인 꽃은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운동을 상징하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총이나 폭탄과 같은 전쟁 무기에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해서 Flower power라고 불렀고요. 또 이런 이유에서 히피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거나 꽃무늬 옷을 입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여행하는 자동차에 꽃무늬를 그려 넣는 등, 이른바 Flower power의 상징을 굉장히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 이 히피들을 꽃의 아이들, Flower children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즉, Flower power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1965년 미국의 비트 세대인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반전 평화 운동을 Flower power라고 처음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유래된 말이 바로 Flower power, Flower children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더욱 고양시킨 평화 운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주창한 상징물이 바로 꽃인 것이죠. Flower power의 일환으로 히피들은 머리에 꽃을 꽂거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꽃을 나눠 주기도 하고 또 시위대를 진압하는 진압대가 들고 있는 총구에 꽃을 꽂거나 아니면 꽃을 트럭에 잔뜩 싣고 가서 시위를 진압하는 진압대 앞에 꽃 폭탄을 날리기도 하는 등 꽃을 자신들의 사랑과 평화의 상징물, 자신들의 반전 운동에 대한 상징물로 잘 이용했던 도구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앨런 긴즈버그의 《행진/장엄한 광경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기고문이 있는데요. 그 기고문의 내용 중에 히피 시위대들은 경찰관,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꽃 무더기를 던져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앨런 긴즈버그의 제안에 따라서 히피들이 Flower power, 꽃의 힘을 사용해서 평화적 시위는 굉장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요. 그래서 훨씬 더 히피 운동을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죠.

히피를 상징하는 노래 - 사이키델릭 록

히피를 상징하는 노래 형식을 꼽자면 사이키델릭 록을 꼽을 수 있는데요. 이 사이키델릭 록은 이름 그대로 나른한 멜로디에 흐느적거리는 리듬을 특징으로 합니다. 마치 마약을 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환각이나 몽환적인 도취 상태를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마약을 촉매제로 사용하는 히피들의 반사회적 행동 양식은 종종 방종이라든가 무책임한 일탈, 약물에 중독된 청소년들의 방황을 떠올리게 되죠. 왜냐하면 히피들에게 정상적인 것이라는 것은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자 나의 삶과 자유를 억압하는 허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약물 사용이 보편화되고 정당화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런 코카인이라든가 LSD와 같은 마약은 사실은 조지 워싱턴 시절, 히피보다 훨씬 이전에는 미국에서 일종의 민간요법처럼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파상풍이라든가 콜레라, 알코올 중독에 의한 섬망증 같은 질병 치료에 주로 약재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던 것이 60년대에 이르러서 대학생들이 마리화나를 사용하는 어떤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약물, 마약들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약물 사용, 보통 마약을 사용한다는 것은 주로 개인적인 단위가 주잖아요. 하지만 히피들의 약물 사용은 공동체적이고 집단적으로 상용화했다는 점이 그 이전의 마약 사용자들과 달라진 점입니다. 즉, 이 시기에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약물에 의한 환각, 쾌락을 즐겼던 것은 히피들만의 반문화, 반체제 운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의미에서 60년대와 함께 본격적인 청년문화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 것이 이 마약 문화라고 할 수 있죠.

비트 제너레이션 종류와 추구했던 목적

비트 제너레이션 종류와 추구했던 목적
비트 제너레이션 종류와 추구했던 목적

비트 제너레이션은 사실 크게 2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힙스터와 비트닉을 구별하는 경우가 있고 구별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요. 굳이 힙스터와 비트닉을 조금 더 구별해 보자면 힙스터는 어떤 혁명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말해요. 그리고 비트닉은 방랑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비트닉은 방금 앨런 긴즈버그의 길 위에 서라는 작품처럼 기성 사회를 떠나서 시를 쓴다거나 재즈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춘다거나 아니면 동양의 선불교에 빠진 사람들을 주로 칭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트 제너레이션은 뉴욕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앨런 긴즈버그, 잭 캐루악, 루시엔 카, 이 세 사람이 만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타임스퀘어 암흑가에서 활동했다고도 해요. 그런데 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주로 그리니치 빌리지, 비트닉 하면 생각나는 동네가 바로 그리니치 빌리지잖아요.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활동하다가 이후에는 샌프란시스코라든가 남쪽에 있는 뉴올리언스에서 모여 살았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중심부로부터 노스비치, 캘리포니아, 맨해튼 남동부를 거쳐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 애시 베리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죠. 그러면서 헤이트 애시 베리 지역은 지금도 보헤미 아니 즘의 새로운 요람으로 성장해서 나중에 70년대에는 바로 히피의 중심지가 되는 거죠. 그들은 자기들만 통하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고요. 자기들만의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그룹이 단단한 연대감과 결속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제임스 딘이라든가 말론 브란도와 같은 반항적인 배우들을 숭배했고요. 또 사회에서 성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경멸했고요. 또 잭 캐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 에서 나타난 것처럼 어디로 가야 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쉬지 않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방랑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획일성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에 어떤 사회가 부여하는 책임으로부터 도피해 보려고 했던 거죠. 그들은 기성 사회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진정한 모습, 감성과 본능적인 감각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트 제너레이션의 추구 목적

이런 비트 제너레이션은 1950년대 미국의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이런 획일화, 동질화의 양상으로 개개인이 거대한 사회 조직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항해서 민속 음악을 즐긴다든가 아니면 산업화 이전 시대의 전원생활, 원시적인 생활, 인간적인 생활을 추구했고요. 또한 인간 정신에 대해서 무한한 신뢰감을 가지면서 낙천주의적인 사고를 중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비트 제너레이션을 황량한 천사들과 천상의 건달들이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도 있고요. 또 이 비트 제너레이션이 주로 들었던 음악이 재즈였기 때문에 반역과 재즈라는 말로 이 시대를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또 잭 캐루악의 길 위에서, 언더 로드라는 작품을 대표로 들어서 시와 길의 시대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이런 작가 잭 캐루악과 그의 친구, 닐 캐세디, 또 배우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 화가였던 잭슨 플록, 그다음에 사진작가 로버트 프랭크, 이들은 모두 티셔츠와 청바지, 가죽 재킷을 입고 다녔던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이죠. 그래서 영화나 지금도 사진을 보면 굉장히 차가운 표정 그리고 진지한 눈매, 묘한 미소를 띤 표정, 그런 것들은 사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매혹을 느끼는 분위기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굉장히 연약하면서도 자유를 원하는 젊은 청년들의 상징적인 분위기였습니다. 이들은 현실 세계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고 또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기성세대들을 믿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던 거죠. 오히려 기성세대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행복이라는 것은 그저 돈을 벌어서 유행 상품을 사는 소비 열풍과 자기만족에 편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성세대들이 싫어하는 행동들을 하기 시작하죠. 성 해방을 외친다거나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한다거나 아니면 현란한 춤추기, 기성세대들이 싫어하는 음탕한 방식으로 춤추기 등을 통해서 부모 세대가 위험하고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특히 이들은 당시에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흑인 분리 정책에 의한 인종차별에도 굉장히 반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힙스터족의 하위문화와 비트족의 하위문화가 이런 동일한 뿌리에서 성장하기는 했지만 그 두 스타일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흑인 문화에 굉장히 의존했고요. 또 그 문화와 관련해서 각각 다르게 위치 지어졌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힙스터족과 비트족의 구분

골드만은 힙스터족과 비트족을 구별하는데요. 힙스터족은 하층 계급의 댄디지만 그 게토 지역에서의 자신들의 비루한 문화들에서 스스로를 구별하기 위해서 되게 냉정하고 지적인 척을 합니다. 그들은 고급스러운 차를 마시고 재즈를 듣거나 아프로큐반 음악의 사운드처럼 일상에서 무언가 고급스러운 것들을 추구합니다. 반면에 비트족은 잭 캐루악처럼 원래부터 진지한 중상 계급, 남자 대학생들인데요. 캐루악이 도시 문화에 질식한 나머지, 먼 이국적 장소에서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이 그룹들은 대부분 도시의 획일성을 거부하고 시골로 간다든가 또 교외로 여행을 한다든가 하는 그룹이 많습니다. 이렇게 순응주의, 획일화, 동질화, 물질주의, 이런 것들에 대해 미국 사회가 지배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풍요롭고 평온한 분위기에 은폐되어 있는 부정적인 속성들이 미국 사회의 순응을 강요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그런 미국 사회에서 순응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마치 진정제를 맞은 환자 같은 상태라고 생각하면서 이 시기의 미국 사회를 진정제 맞은 1950년대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런 비트닉이라든가 힙스터의 분위기는 영화 <킬 유어 달링>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요. 이 킬 유어 달링에도 보면 콜롬비아 대학의 신입생인 앨런 긴즈버그와 잭 캐루악과 윌리엄 버로우즈가 뉴 비전이라는 새로운 문학 운동을 진행하는 내용들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대학교 신입생 남자 대학생이 문학, 음악으로 진부한 미국 사회의 새로운 비전, 뉴 비전을 문학으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의도로 하는 운동이 바로 뉴 비전 운동인 거죠. 이렇게 1950년대 로큰롤을 둘러싼 청년문화는 미국 음악, 특히 흑인들이 만들어 놓은 재즈와 블루스, 백인들의 컨트리 음악, 이런 것을 융합하면서 20세기 전 세계 대중음악을 주도해 갔습니다. 이런 흑인 노예들의 음악으로 100년 대중음악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미국 대중음악의 모습은 우리가 50년대부터 쭉 살펴볼 예정인데요. 흑백 인종 갈등의 비극을 오히려 청년들이 자신들의 문화로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의 경계를 허물면서 오히려 흑백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흑백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로큰롤 뮤직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로큰롤 키드들은 흑인들과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백인 기성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하위문화를 자체적으로 형성했다는 흥미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죠. 이러한 풍조는 60년대 영국 청년 문화로 이전해서 테디 보이라든가 모드족과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만들고 70년대는 미국의 히피 문화로 확대됩니다. 오늘은 1950년대 로큰롤을 둘러싼 청년문화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이렇게 미국의 대중음악은 미국의 역사 그리고 청년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되어 있음을 로큰롤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60~70년대의 미국과 청년들의 문화(히피문화)

60~70년대의 미국과 청년들의 문화(히피문화)
60~70년대의 미국과 청년들의 문화(히피문화)

60년대 70년대, 6~70년대 미국은요. 일단 가장 큰 베트남 전쟁이 60년에 발발해서 75년에 끝나니까, 약 10년이 넘는, 한 15년 정도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요. 40대의 젊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가 암살됐고, 또 흑인 인권 운동의 지도자였던 말콤 X라든가 마틴 루터 킹도 암살을 당하게 되죠.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폭동 등이 있었고요. 이렇게 미국 사회는 정말 그 사회적 부조리, 정치적 모순,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미국의 풍경은요. 청년들로 하여금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농업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정착해서 그곳에서 자기들만의 전원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었어요. 미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암살 사건과 테러 사건들을 지속적으로 목도했던 이들은 왠지 미국 사회가 곧 붕괴할 것 같아고 파국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미국 사회를 떠나는 것이었는데요.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원 공동체, 시골에 내려가서 우리끼리 사는 것, 우리끼리 자급자족해서 사는 것을 택했던 거죠. 더욱이 미래의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될 산업 사회에 대한 공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전원 공동체의 삶이 효과적인 대안적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들은 스스로 사라져 버린 전근대의 세계를 조직해서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자 했던 것이죠. 게다가 베트남 전쟁을 목격한 히피들은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평화를 사랑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자연은 인간보다 항상 완벽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회귀, 자연으로의 귀의를 외쳤습니다. 또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과 유희를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히피의 사고방식이나 라이프스타일은 60년대의 좌파 운동, 미국 시민운동과 함께 1960년대 70년대 미국 사회의 대표적인 반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히피문화와 약물

히피들을 얘기할 때는 또 마약을 빼놓을 수가 없죠. 이들은 마리화나나 LSD와 같은 환각 약물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상징이라든가 사상을 구체화시켜 갔습니다. 이 시기에 6~70년대의 히피들이 마약을 하는 것은 굉장히 일상적인 일이었는데요. JOBS라는 영화 등을 통해서 그 청년들이 친구들끼리 모여서 그냥 가볍게 마약을 하는 장면들은 여러분도 더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LSD는 가장 강력한 환각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LSD를 옹호하는 청년들은 LSD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을 억압해서 삶을 규격화시키는 의식, 그런 인식을 해제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60년대에는 비틀스조차도 마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음반을 만들기도 했다고도 이야기하고요. 그 음반이 바로 팝 역사상 최고의 음반으로 불리고 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d Band라는 67년에 나온 콘셉트 앨범입니다. 이 앨범의 재킷 사진만 보더라도 일렬로 여러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의 복장을 보면 다 히피 복장을 하고 있어요. 1967년은 그만큼 히피들의 의식이 절정에 달했을 때입니다. 약물 복용을 통해서 참된 잠재의식을 일깨우고 더 나아가서 그런 의식의 확장을 꾀함으로써 기존의 법이라든가 도덕, 종교와 같은 기성 질서의 틀을 바꾸려는 의지가 담긴 열정이 가장 폭발했던 때였던 것이죠. 특히 이들은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강력했는데요. 이 시기에 비틀스 라든가 롤링 스톤스가 인도를 방문하거나 도어스의 곡인 Shaman's blues라는 곡도 제목만 봐도 동양 종교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가 있죠.

히피들의 주거 주지 - 샌프란시스코

중요한 것은 히피들이 주로 생활했던 근거지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였다는 건데요. 비트족에 영향을 받은 샌프란시스코 청년들이 히피 정서에 틀을 확립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비트 세대, 비트 제너레이션을 볼 때도 샌프란시스코는 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근거지였잖아요. 그 정서들을 히피들이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죠.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Haight Ashbury 지역은요. 히피의 정신인 Love & Peace, 사랑과 평화 그리고 공동체 의식에 일환으로 Haight Ashbury 지역의 가게 주인들이 무상으로 식량을 나눠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무상으로 식량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는요. 일종의 돈으로 물건을 거래하고 또 그것이 반복하면서 부자가 되는 일반적인 통념을 부정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Haight Ashbury 지역은 오래된 중산층 구역인데요.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에는 골든 게이트 파크가 있잖아요. 이렇게 샌프란시스코 도심 속의 소중한 휴식 공간으로 지금도 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공원에는요. 당시에도 나무가 많고 또 개발이 되지 않았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히피 공동체가 반문화적 의식, 즉, 앞에서 얘기했던 전원 공동체와 같은 자연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 어른들과의 세계와 단절하기 위해서 자주 모여서 살았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골든 게이트 공원이 위치에 있는 Haight Ashbury는 히피 공동체가 해산하기 직전까지 반문화의 기념비적인 장소로 지금까지도 유명합니다. 1955년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일으킨 샌프란시스코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히비 공동체의 주요 활동 지역이 샌프란시스코였다는 점은 이곳이 청년들의 반문화 운동에 지배적인 지역이었다는 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지금까지 히피들의 패션과 히피들의 주요 거주지, 샌프란시스코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의 청년문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흑인 인권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였죠. 사실 그 55년에 로자 파크스 사건 이래로 드디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흑인 인권 문제가 하나의 중요한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즐기는 음악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전례 없는 융합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었죠. 이러한 백인과 흑인의 융합에 대해서 당당한 청년들의 선언들은 인종, 성, 사회적 체제에 대한 반역, 이런 것들을 소재로 한 논쟁을 대거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분위기에서 출현한 음악이 바로 로큰롤이었잖아요. 로큰롤의 출현과 관련된 이 징후들 중의 하나가 비트족과 힙스터 족에 대한 미국 기성세대의 격분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먼 메일러의 화이트 니그로, 미국의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은 자식들이 화이트 니그로가 되려고 하는 의도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대응했었죠. 마찬가지로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도 어떤 흑인 문화에 대해서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 문화를 이상화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문화였던 힙스터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한 청년들의 문화 중의 하나가 바로 힙스터입니다. 사실 힙스터는 1940년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종했던 소수의 백인, 중산층 청년들의 문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도 많이 쓰고 있는 말이죠, 힙스터라는 말은. 그런데 5~60년대의 힙스터라고 이야기하면 주로 재즈 뮤직에 열광하면서 일정한 거주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청년 그룹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1950년대의 힙스터들의 주 무대는 그리니치 빌리지와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 베리 구역을 주요 정착지로 정하면서 비트 세대, 비트닉을 부르는 말로 나중에 변하게 되죠. 그래서 사실 지금은 비트닉, 비트 제너레이션보다는 힙스터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사실 이 비트닉과 힙스터는 굉장히 유사한 청년 그룹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주류 질서와 도덕에 반발하는 방랑자 문학, 예술가 집단이 생겨나는데요. 이 작가들은 자칭 자신들을 '패배자 집단'으로 불리면서 비트닉, 비트 제너레이션, 비트 세대를 형성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뉴욕이라든가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에 모여 살면서 서로의 문학적 관심을 공유한 소수 작가 그룹으로 출발했는데요. 이런 비트 세대의 작가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잭 케루악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 사용 당시 비트 뜻

이 케루악이 처음 사용했다는 비트라는 어휘는 바로 2가지 뜻이 있는데요. 첫 번째 beaten-down, 즉 패배한, 짓밟힌이라는 뜻이 있고요. 이런 beaten-down이라는 의미는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고립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케루악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고요. 또 주류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감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배자들은 외적, 사회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순수성, 사회에 성취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문화적인 노력으로 발현됩니다. 그래서 가식이라든가 관습, 권태, 권위, 억압, 이런 위선을 상징하는 제도권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 비트닉들은 실존주의적 가치, 행동의 공허함, 허무주의적 태도를 내세우면서요. 기성의 모든 가치라든가 체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청교도 윤리보다는 어떤 동양의 종교라든가 동양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적 태도, 재즈, 시, 약물 주로 마리화나를 들 수 있는데요. 그리고 문학, 이런 것들의 예술적이고 신비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이런 것들에 가치를 두면서 반문화 공동체의 코드들을 마련한 세대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트닉들은 특히 비밥 재즈에 열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전에 40년대까지는 스윙 재즈가 주로 재즈의 절정을 몰고 갔었는데요. 스윙 재즈는 주로 댄스가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비밥 재즈는 굉장히 듣기 어렵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청취, 감상용 재즈라고 할 수 있거든요. 스윙 재즈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에요. 스윙 재즈가 뭔가 몸을 많이 흔들어야 되는 댄스를 위한 재즈 뮤직이라면 비밥 재즈는 뭔가 고도화된 테크닉의 연주 감성들을 가지고 있는 재즈이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듣고 있기에는 약간 조금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반면에 비밥 재즈의 어떤 심오한 세계, 신비주의적 세계, 문학이라든가 비주류의 어떤 감각, 이런 것들을 청년들이 매혹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도록 문학적 가치까지 가미한 비트닉의 중요한 분위기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밥 재즈는 화성이 굉장히 확장돼 있고요. 또 리듬이 굉장히 불규칙하고 게다가 즉흥 연주의 자유로움, 악보가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들의 자유에 맡기는 음악이기 때문에 이전에 스윙 재즈에서 볼 수 있었던 규칙적인 연주 형식에서 벗어난 굉장히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재즈가 바로 비밥 재즈죠. 그래서 사실 비밥 재즈는 재즈사에서도 형식적인 음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비트 세대 문학의 대표

이런 비밥 재즈를 좋아했던 비트 세대, 문학의 대표는 바로 앨런 긴즈버그를 들 수 있죠. 앨런 긴즈버그의 유명한 소설이 바로 Howl, 절규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Howl의 저자인 앨런 긴즈버그와 길 위에서의 작가 잭 캐루악, 네이키드 런치의 작가 윌리엄 버로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네이키드 런치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있죠.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미국 사회를 거대한 관료주의의 독점, 경찰국가적인 전체주의의 집단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의 어떤 딱딱한 도덕률 그리고 억압된 관료주의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이런 것을 비판한 긴즈버그의 Howl이라는 작품은요. 비밥의 즉흥 연주 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자유와 파격적인 문학 작품입니다. 잭 캐루악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는 길 위에서는요. 빈민층의 어떤 살아있는 생생한 어법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윌리엄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이런 작품도 30년대 초반, 뉴욕을 여행하다가 우연히가 아닌 의도적으로 갱스터 세계에 뛰어들어서 심각한 헤로인 중독자가 되는 주인공들을 작품에서 등장시키고도 있습니다. 비트닉은 이런 개인주의적 면모로 집단을 유지한 예술가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보헤미안적인 허무주의, 쿨 재즈, 마리화나, 선불교와 같은 동양 신비주의를 자신들의 사상과 혼합해서 굉장히 독특한 문학을 선보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 70년대 히피문화가 떠오르죠? 바로 이 비트닉이 70년대에 가면 히피문화의 중요한 어떤 소재들이 되는 거죠. 이런 적극적 방랑을 택한 소수의 집단적인 자기 도피를 꿈꿔왔던 청년들이요.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가장 어둡고 낮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운둔하면서 이런 미국의 어떤 체제를 지우고 그 체제에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어떤 루저의 문명, 루저의 삶을 택한 사람들인 거죠. 이들은 중산층적 삶의 무력함 또는 폐쇄적인 실존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한 청년 그룹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 이런 빈곤 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는 흑인들은 급진적인 백인 지식인들에게 막혀 있던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트닉을 추구하던 청년들의 모습에서도 화이트 니그로의 모습이 떠오르죠.

2차 세계대전 이후 재즈의 흐름

2차 세계대전 이후 재즈의 흐름
2차 세계대전 이후 재즈의 흐름

흔히 재즈는 흑인 음악이라고들 말하지만, 모든 문화의 속성이 새로운 것과 낡은 것들이 어떤 계기를 만날 때마다 서로 교류하고 혼합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장르를 형성하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처럼요. 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즈의 기원이 흑인들에게서 비롯된 것은 사실이지만 재즈가 발전하는 경로를 보면 백인 음악과 수많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서로 교류하고 절충하고 혼용을 거치면서 새로운 형태의 재즈 장르가 나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즈는 아프리카의 흑인 문화와 유럽의 백인 문화가 만나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재즈 뮤직에서 사용되는 악기들도 모두 클래식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죠. 초창기 뉴올리언스 재즈의 악기 구성을 보면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로는 코넷 클라리넷 트롬본 같은 것들이 있고요. 또 리듬 파티를 연주하는 악기에는 기타, 벤조, 튜바, 드럼 같은 것들이 있는데요. 이 악기들은 거의 클래식에서 사용되던 것들입니다. 색소폰도 원래는 클래식 악기로 탄생했지만, 현재는 재즈음악을 위한 악기로 더 널리 알려져 있죠. 어떤 음악은 백인 성향이 강하다고 말하고, 어떤 음악은 흑인 성향이 강하다고 말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뉴올리언스의 거주민들이 이주 역사를 통해서 백인과 흑인들이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재즈 역시 또 자연스럽게 흑백 인종의 문화가 융합되었던 것처럼 그 이후에 분화된 재즈 장르 역시 흑백의 인종과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합류해갔습니다.

백인 음악과 흑인 음악의 특징과 차이

음악에서 어떤 것이 흑인의 것이고 어떤 것이 백인의 것인지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아주 어렵지만요. 여기서는 편의상 보통 범박하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구분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보통 흑인 음악의 특성은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데 비해서 백인 음악의 특성은 잘 정돈되고 유려한 느낌이 강하다는 점에서 절제미가 강하고 이성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즉 백인 음악은 잘 기획된 음악처럼 하모니와 멜로디가 정제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데 비해서 흑인 음악은 즉흥연주를 좋아하고 리듬이 강조되기 때문에 다소 거칠고 자극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여기서 즉흥연주를 Improvisation이라고 하는데요. 재즈 이전의 클래식, 백인의 음악인 잘 정제되고 엄격한 형식을 갖춘 클래식과 비교해본다면 재즈의 즉흥성은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며 또 자유로운 음악이라는 점이 느껴집니다. 특성을 기초로 해서 재즈 장르의 분화도 구분되곤 하는데요. 먼저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가 흑인적인 느낌이 강한 데 비해 딕시랜드 재즈는 백인적 성향이 강하고요. 또 그 이후에 출연한 스윙 재즈가 백인적인 느낌이라면 그 뒤를 이은 비밥은 흑인적이라고 간주됩니다. 그 뒤에 나온 하드밥이 또 흑인적인 느낌이라면 동시대의 쿨 재즈는 백인적인 느낌이고요. 또 그 뒤를 이른 프리 재즈가 흑인적이라면 퓨전 재즈는 백인적인 느낌이 강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사실 추상적이고 복잡한 재즈의 원리와 구조를 이런 식으로 구조화해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범박하게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의 특성을 구분해보자면 이렇다는 이야기인데요. 재즈 장르가 발전하고 분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성격들이 유난히 강조된 장르들을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쓰는 방식이 이런 느낌이라고들 보통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인 재즈 지식을 알고 접근하려면 재즈에 대한 반감이 생기거나 또 재즈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고 재즈에 대한 흥미를 갖기 위해서 약간 계량화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스윙 재즈 이후의 재즈의 진화 과정

1920~40년대를 풍미했던 스윙 재즈 그 이후, 그리고 45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재즈의 진화 과정이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쳤는가를 조금 살펴보려고 합니다. 1930년대만 해도 음반 판매량의 85%나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스윙 빅밴드들도 2차 대전이 끝나면서는 그 세력을 조금씩 상실해 갔습니다. 1945년 스윙 이후의 재즈는 이전과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진화하는데요. 이때부터의 재즈를 모던 재즈라고 합니다. 뉴올리언스 재즈, 딕시랜드 재즈, 스윙 재즈 이후의 모던재즈의 진화 과정은 비밥-쿨 재즈- 하드밥- 프리재즈-퓨전 재즈 순으로 보통 언급되는데요. 흑인 음악의 특징이 강조된 재즈가 먼저 탄생하고 그 이후에 백인 음악의 특징이 가미되어서 흑인과 백인의 성향이 융합된 장르가 재즈가 된 것처럼 모던 재즈의 진화 과정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시간에는 모던 재즈라고 불리는 비밥-하드밥-쿨 재즈-프리재즈-퓨전 재즈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모던 재즈의 첫 장에 위치하는 '비밥'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도시가 바로 캔자스시티예요. 1930년대 당시 엄청나게 상업화된 빅밴드의 스윙 재즈가 백인들이 춤을 추고 흑인 빅밴드의 연주가 BGM 역할을 하는 방식이었죠. 빅밴드는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함께 만나서 연주의 균형을 맞춰보고 연습하는 그런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재즈 특유의 즉흥연주에서 벗어난 것이었고요. 또 청년들이 춤을 추기 위해 연주한 것이다 보니까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재즈 연주가 아니라 무언가 춤추는 사람들을 더 신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음악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재즈 아티스트로서의 포지션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고요. 또 뮤지션으로서의 연주에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젊은 신세대 흑인 연주자들은 이런 빅밴드 연주 방식이 식상하다고 느꼈고요. 그래서 새로운 출구를 찾아가는 과정과 경험을 거치게 되는데요.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비밥 재즈입니다.

재즈와 함께한 루이 암스트롱의 일생

재즈와 함께한 루이 암스트롱의 일생
재즈와 함께한 루이 암스트롱의 일생

스윙 재즈의 대표 뮤지션을 들 때 가장 첫 번째의 주자는 바로 루이 암스트롱일 것입니다. 지금의 스윙 재즈의 형태를 대중화하고 정착시킨 인물이기도 하고요. 또 1901년에 태어나 1971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생애가 미국 재즈 전체의 역사와 함께 살아갔고 또 재즈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아주 독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도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를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재즈 뮤지션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자 악기 연주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화려한 보컬 기술이라든가 또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목소리로 재즈 보컬의 일인자로 평가받으면서 항상 미소가 가득한 선한 아저씨의 인상으로도 지금까지 많은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죠. 재즈 하면 떠오르는 가장 첫 번째 인물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의 곡은 광고에도 많이 사용되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목소리로 루이 암스트롱의 이름을 모르더라도 그의 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또 1963년에는 한국에 워커힐 호텔이 개관할 때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의 곡은 셀 수 없이 많기도 하고 또 1920년대부터 197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각 시대별로 변화되었던 재즈 장르들을 모두 섭렵했기 때문에 다양한 곡들이 있어서 다 들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정감 가는 재즈 뮤지션인 듯합니다. 처음에는 코넷 연주자로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트럼펫 연주자로 그다음에는 보컬로 옮겨가면서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아지지만 여기서는 그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서 스윙 재즈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루이 암스트롱과 스윙재즈 역사

루이 암스트롱은 1901년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하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은 재즈 뮤지션들의 인생 스토리는 상당히 비극적인 경우가 많은데요. 당시 흑인의 삶은 빈곤이라는 말로 다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는데, 루이 암스트롱의 어머니가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6세였고요. 거기에 더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처지였습니다. 미혼모였던 그의 어머니는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갔고, 어린 루이는 석탄이나 폐품을 팔아서 나르며 가계를 도왔습니다. 루이는 1913년 새해 전날 밤 축제 때 쓸 공포탄이 들어 있는 새아버지의 권총을 가지고 놀다가 잘못 발사되는 바람에 경찰에 붙잡혀 소년원에 들어갔는데요. 어린 소년이었던 루이는 거기서 기상 시간, 식사 시간이나 소등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악기 연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죠. 그 소년원에 갇혀 있던 18개월 동안 거기서 처음 배운 코넷 연주가 그의 일생을 결정 지었습니다. 트럼펫과 비슷하게 생긴 코넷은 초기 재즈에 주로 사용되었던 금관악기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뉴올리언스 군악대에서 많이 사용했습니다. 코넷 연주 실력이 빼어났던 루이는 소년원을 나온 후 13살 무렵에 트럼펫 연주를 배웠고요. 15살이 되면서 당시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코넷 연주자, 킹 올리버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데이지 파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던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스의 거리와 살롱에서 재즈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뉴올리언스에 해군 기지가 설치되었죠. 스토리빌의 홍등가가 폐쇄되면서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시카고로 이주할 때였잖아요. 시카고로 떠나기 전에 루이 암스트롱은 미시시피의 증기선의 악사로 일하면서 실력을 키우다가 1922년 시카고로 갔습니다. 루이는 이 증기선의 악사로 일했던 시기를 자신이 마치 대학 공부를 했던 것과 같았다고 회상한 바 있습니다. 과거 시카고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시카고 재즈는 마피아의 밀주 산업과 나이트클럽, 카바레 등 유흥업소의 향락 문화에 의존한 채 번성해가고 있었습니다.

킹 올리버 크레올 재즈밴드와 만남

1922년 루이는 그보다 앞서 시카고로 건너가 재즈밴드를 이끌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옛 스승인 킹 올리버와 함께 일을 시작하며 코넷 연주를 했는데요. 그 밴드가 바로 '킹 올리버 크레올 재즈밴드'였습니다. 이 밴드 활동에서 루이 암스트롱은 시카고 재즈 신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또 이 밴드의 피아니스트였던 릴 하딘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스윙 재즈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케스트라 규모의 빅밴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던 시기에 빅밴드 재즈 형식을 최초로 만들어낸 뛰어난 실력자인 플레처 핸더슨이 루이 암스트롱의 실력을 보고 자신의 밴드에 들어와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플레처 헨더슨의 권유로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건너가 연주 활동을 해가며 그는 최고의 코넷, 트럼펫 연주자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듀크 엘링턴과 같이 당시 실력 있는 모든 밴드의 리더들이 그와 함께 음악하기를 바랐습니다. 시카고에 와서 암스트롱은 코넷, 트럼펫 연주 외에도 보컬로 활동하기도 했는데요. 이때 자신이 개발한 특유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보컬 기술인 스캣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루이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스캣이란 것은 재즈 보컬 특유의 창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중간중간에 즉흥적으로 '두비두밥 밥'하는 것처럼 아무 뜻도 없는 의성어들을 내뱉으며 노래를 부르는 부분이 바로 그것을 스캣이라고 합니다. 이 스캣은 재즈 보컬을 굉장히 독특하고 리드미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주는데요. '스캣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엘라 피츠제럴드조차 루이 암스트롱에게 이 스캣을 배웠다고 할 정도니 그의 스캣 기술은 지금 봐도 최고이기도 하죠. 요즘도 재즈 보컬 하면 떠오르는 것이 스캣일 정도로 스캣 테크닉은 재즈 보컬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 킹 올리버 밴드에서 나오게 된 루이는 자신의 밴드를 만들게 되는데요. 1925년에 만든 '핫 파이브'와 1927년에 만든 '핫 세븐'이 바로 루이 암스트롱의 밴드입니다. 이 밴드들과 함께 한 첫 앨범 핫 파이브는 그동안에 갈고닦은 실력이 드러나면서 '재즈의 정석'을 정립한 앨범으로 평가됩니다. 재즈 역사의 선구자로서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는 각별하죠. 먼저 연주자의 즉흥연주, 그리고 연주자마다 돌아가면서 솔로 연주를 하는 방식, 그리고 재즈의 큰 특징인 스윙 리듬을 완전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면서 오늘날의 재즈 뮤직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는데요. 이렇게 해서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를 혁명적으로 바꿔놓은 인물로 보는 데 이견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보컬은 열정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스윙감이 넘칩니다. 또 재즈가 어렵다는 인상을 주는 장르이긴 하지만 루이 암스트롱의 곡은 광고에도 많이 사용될 정도로 대중적으로도 유명하잖아요. 그만큼 그의 재즈는 어렵다기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하고 듣기에도 편한 곡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당시 독특하고 뛰어난 연주로 인기를 얻고 있었던 루이가 5인조 밴드 '핫 파이브'와 7인조 '핫 세븐'과 같은 자신의 밴드를 만들어서 뉴올리언스 스타일을 완성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지만, 또 술집에서 재즈 연주를 하면서 늘 웃는 얼굴로 백인 손님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유머를 구사하면서 흑인 아티스트로서의 생존 전략을 잘 구사해갔던 그의 품성도 한몫을 했습니다. 나중에 신세대 청년 흑인 뮤지션들은 이런 루이의 광대 같은 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흑인이 예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으로 용납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에 흑인인 루이 암스트롱이 온갖 차별과 천대를 받는 환경 속에서 그의 미소와 친절은 아티스트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세대 청년들의 눈에는 그것이 굴욕적인 모습으로 비쳤습니다. 하지만 술집에서 연주하는 흑인의 음악은 천박하고 음탕한 것이라는 시대적 감성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력을 연장하면서 최고의 재즈 뮤지션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루이 암스트롱의 행보는 무언가 서글프지만 강인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흑백을 아우르며 미국인 전체, 나아가 전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재즈 뮤지션의 명성을 얻는 데 일조했기 때문입니다. 1929년 세계로 확산된 대공황의 여파는 재즈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재즈 뮤지션 대다수가 일용직 노동자,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생계유지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하는 때였죠. 이미 재즈계에서 명성을 얻은 뮤지션들조차 미국의 경제 위기를 피해 유럽 진출을 모색했습니다. 1932년 루이도 유럽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했는데요. 이때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환대를 받았습니다. 1933년은 미국 경제에서 중요한 시기인데요. 바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이 실시되면서 조금씩 경제가 회복되어가던 때였고요. 또 스윙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때이기도 했죠. 루이도 이때 스윙 댄스의 빅밴드 열풍에 합류합니다. 이때 수십 장의 음반이 히트하고 또 영화에 출연하거나 TV에도 단골로 출연하면서 수입도 증가했죠. 하지만 2차 대전 시기 재즈가 모던 재즈로의 전환기를 맞을 때 신세대 재즈 뮤지션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루이의 재즈는 구식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의 재즈 활동도 이렇게 시대적 전환을 겪을 때마다 부침을 겪었던 것이죠. 그의 활동은 주춤했지만, 1949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커버에 그의 얼굴이 등장했는데요. 이것은 재즈 뮤지션으로는 최초의 사례였다고 합니다. 1963년 루이는 서울에 워커힐 호텔 개관식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했고 2주간의 공연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63세이었는데요. 이때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에 게스트로 등장해서 그와 똑같이 노래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윤복희 씨였어요. 당시 나이 15세였던 윤복희 씨는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1960년대 비틀즈와 루이 암스트롱

1960년대는 비틀스의 인기가 전 세계를 휩쓸었죠. 그동안 대중음악계는 미국 음악이 일색이었는데요. 영국의 그룹 비틀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비틀스와 유사한 남성 4인조 록 밴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시기도 이때였죠. 미국의 음악이 일색이었던 풍경에 영국의 밴드들이 침공했다는 의미에서 이때를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대 록의 시대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재즈의 인기도 차츰 사그라들 때였죠. 일찍이 비틀스는 자신들의 음악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미시시피 출신의 엘비스 프레슬리는 백인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흑인음악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고 그런 환경은 엘비스 가 흑인처럼 노래할 수 있도록 흑인음악을 할 수 있도록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1960년대 록의 열풍은 흑인 음악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964년 루이가 64세에 발표했던 곡, '헬로 돌리'는 비틀스를 누르고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곡이 아마도 'What a wonderful world'일 텐데요. 불후의 명곡으로 꼽히는 이 곡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967년에 나온 것인데요. '굿모닝 베트남'과 같은 영화와 드라마, 각종 CF 등에서 사용되면서 이 곡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곡이 되었습니다. 이 곡은 재즈라기보다는 팝에 가까운 곡으로 우리 귀에도 아주 친숙하게 들립니다. 이 곡은 원래 베트남 전쟁의 와중에 인간 세상에 전쟁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인간이 인간을 믿는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뭐 그런 메시지를 담은 곡인데요. 특히 1987년의 영화 <굿모닝 베트남>에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깔려서 역설적으로 메시지를 전해준 것인데요. 루이 암스트롱이 흑인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생애, 67세의 노년을 맞은 루이의 생애에서 볼 때 온갖 차별과 학대를 받으면서 일평생을 살아갔던 그의 일생이 이 곡과 오버랩되면서 이 곡은 듣는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곡은 아주 듣기 편하고 아름답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어떤 페이소스가 느껴집니다. 노년을 맞이한 루이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1971년 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2주간의 공연을 이어가다가 공연 끝 무렵에 심근경색으로 입원했다 퇴원했는데요. 그 이후에도 트럼펫 연습에 몰두하다가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훗날 그의 고향인 뉴올리언스는 그를 기념하는 루이 암스트롱 공원이 만들었고요. 또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루이 암스트롱 뉴올리언스 국제공항도 생겼습니다. 또 그의 집이 자리해 있던 뉴욕 퀸스에 있는 테니스 경기장 이름은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으로 불립니다. 대중음악은 단독으로 생겨나기보다는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그것을 배경으로 한 시대적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탄생합니다.

재즈와 역사적 배경

재즈는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전개할 무렵 농장에서 일할 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강제로 아프리카에서 미국 대륙으로 끌려온 흑인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남북전쟁과 1차 대전, 대공황,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첨단 기술이 발전하고 흑인의 인권이 조금씩 향상되면서 그 시대에 유행하던 트렌드와 정치 경제적 변천사와 관련되면서 다양한 재즈 장르로 발전해왔습니다. 1920년대 금주법이 시행되던 때는 마피아의 밀주 사업과 함께 스윙 재즈가 발달했지만, 2차 대전 이후부터는 댄스를 위한 스윙 재즈가 쇠퇴하면서 감상 위주의 모던 재즈가 발전했습니다. 이처럼 재즈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와 공존해갔던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의 역사는 이렇게 미국의 역사와 매우 관련성이 높은데요. '스윙의 시대'로 불리는 미국의 1920년대는 모든 사람들이 벼락부자가 될 것처럼 흥분했던 최고의 경제 호황으로 시작해서 최악의 대공황으로 끝난 시대였습니다. 스윙 댄스가 강렬한 열풍이 몰아쳤다가 월스트리트의 주식시장이 일거에 무너지는 대재앙으로 끝난 시대였던 것이죠. 미국인들이 이때처럼 유행에 민감하고 짜릿한 스릴을 즐기며 자기만족적인 쾌락에 빠져든 적도 없었습니다. 플래퍼족의 자유분방함, 댄스 시합, 린드버그의 최초 대서양 횡단비행, 재즈, 스포츠카, 마피아들의 전쟁, 금주법을 조롱하는 밀주 밀매업 등 이 모든 것들이 1920년대의 미국 사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0년대는 '금주법의 시대, 무법의 시대, 광란의 20년대, 벼락부자의 시대' 등으로 불리면서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풍조의 확산을 더해 갔습니다. 이렇게 1920년대는 무엇인가 바라는 일이 있으면 주저 없이 행동에 나서는 결단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청년들은 대공황으로 고통을 겪는 시절에도 스윙댄스를 추느라 여념이 없었고, 그것은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행위였습니다.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스의 홍등가에서 매춘부의 자식으로 자랐지만 재즈의 혁명을 일으키며 재즈의 역사를 다시 쓴 경이로운 존재감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가진 독보적인 예술적 천재성은 백인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를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을 그치지 않는 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람 좋은 아저씨처럼 보이는 그의 미소는 자신의 비참했던 생애를 무화시키는 듯했고 전쟁이 없는 멋진 세상을 꿈꾸며 모든 인종을 포용하는 원더풀 월드를 재즈를 통해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루이 암스트롱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대공황과 뉴욕 스윙 재즈의 탄생

대공황과 뉴욕 스윙 재즈의 탄생
대공황과 뉴욕 스윙 재즈의 탄생

미국에서 시작된 이 대공황은 곧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전 세계가 연이어 대공황 사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1929년에 시작해 1939년까지 세계적으로 지속된 경제 대공황은 1933년에 실업률이 무려 25%에 달하는 참담한 사태에 달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습니다. 스윙 재즈는 시카고로 이주한 뉴올리언스 재즈 뮤지션들에 의해 싹을 틔운 것이라면 1930년대에 이런 분위기가 새롭게 뉴욕을 재즈의 본고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때 백인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이 혜성처럼 나타나는데요. 베니 굿맨이 화려한 오케스트라 밴드를 구성해서 스윙 재즈 연주를 선보이게 되자 10대 백인 청년들이 여기에 열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윙 재즈에 배타적이었던 백인 중산층도 결국 스윙 재즈 열풍에 합류하게 되는데요. 흑인의 음악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불경한 것으로 생각했던 당시에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매우 파격적인 일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스윙 재즈는 청년들을 비롯해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인 문화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후 스윙 재즈는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30년대 말에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음악 비즈니스가 됩니다. '스윙'이라는 말이 담배나 여성 의류, 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상품 마케팅 수단이 될 정도로 거대한 문화 상품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여러분, 스윙 재즈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을 텐데요. 스윙 재즈는 말 그대로 청춘 남녀들이 격렬한 댄스를 추기 위한 음악이었거든요. 커다란 댄스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춤을 추기 위해서는 배경음악 소리가 아주 커야겠죠. 그래서 스윙 재즈의 시대에는 네다섯 명으로 구성된 콤보 밴드가 아니라 클래식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주자의 숫자가 확대된 빅밴드의 형태로 연주를 했습니다. 또 댄스를 위한 음악이었던 만큼 연주 속도도 아주 빨랐습니다. 스윙댄스는 정말 전 세계의 청년들을 사로잡았는데요.

나치 독일과 스윙 키즈

1930년대 나치 독일의 히틀러 정권에서도 스윙 키즈들을 통제하는 데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93년에 개봉한 영화 '스윙 키즈'입니다. 1930년대 독일, 나치당의 히틀러 정권 치하에서 스윙 재즈를 좋아하는 10대 소년들이 밤마다 클럽에 나가 지터벅을 추는 장면이 압권인데요, 스윙 키즈들이 나치 정권의 검거를 피해 비밀클럽에서 스윙 재즈를 출 때 그때 나오는 음악이 바로 스윙 재즈 시대의 대표적인 곡인 '싱싱싱'입니다. 이 10대 청소년들 중에서 다리가 불편해서 춤을 출 수 없는 아비드라는 소년이 있는데요. 이 아비드는 춤 대신 기타로 스윙을 멋지게 연주하죠. 이들은 자신들을 '스윙 키즈'라고 부릅니다. 당시 독일 청년들은 '히틀러 청년단'에 가입해야 했지만 이 청년들은 들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나치 정부는 이 '스윙 키즈'들을 단속하는 데 이런 골머리를 앓았던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서 보입니다. 보수적인 나치 정부는 이 스윙 재즈가 청소년들을 방종으로 이끄는 저속한 음악으로 치부했기 때문에 이 댄스 음악을 탄압했었죠. 1935년 독일 방송국들이 재즈 방송을 전면 금지했고요. 대도시에 즐비해 있는 재즈클럽과 거기에 속해 있는 밴드들 역시 이런 탄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독일의 댄스음악이 아니라 미국의 재즈 음악에 몰두했고요. 또 그것을 금지하는 독일 나치 정부를 조롱하듯이 정부의 탄압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클럽에서 밴드가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재즈를 연주할 경우에는 관중들이 야유를 퍼붓거나, 그런 것을 집어치우고 스윙을 연주하라고 외치며 미국식 스윙 재즈를 연주하도록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미국과 독일이 적국이 되어 싸우던 2차 대전 중에도요. 독일의 스윙 청년들은 스윙 축제를 개최하기까지 했는데요. 이후 이들이 주최한 공연이 나치 정부로부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비밀 지하 클럽으로 그 거점을 옮겨가면서 이 소년들은 재즈를 탐닉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독일 나치 정권하의 비밀 국가경찰인 게슈타포는 이미 1930년대 후반부터 스윙 청소년들에 대한 보고를 수집하기 있었고요.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나치 관제 청소년 단체들에도 '스윙에 탐닉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1942년부터는 이 스윙 키드들에 대한 탄압도 더 심해졌는데요. 심지어 이 아이들을 체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념과 정치를 초월한 스윙 재즈

또 스윙 재즈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도 있죠. 2018년도에 개봉한 한국영화 '스윙 키즈'에서도 스윙댄스에 푹 빠진 북한 청년 로기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마련되었는데요. 여기에는 전쟁 중에 붙잡혀온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서 세워진 수용소였습니다. 당시 전국에 설치된 수용소 중에서도 이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자그마치 17만 명이 넘게 수용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수용된 포로들은 전부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한에 남기를 바랐던 반공 포로들이 있었고요. 또 공산주의 이념을 깊이 믿으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친공 포로들이 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반공포로와 친공 포로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심지어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인민 영웅의 동생으로 친공 포로 쪽에 서 있던 청년 로기수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서 만난 미국인 잭슨이 탭댄스를 추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흠뻑 빠져서 잭슨에게 탭댄스를 배우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러시아 출신의 청년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미국 청년의 춤을 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잭슨의 격렬한 춤사위에 매료되면서 결국 로기수는 탭댄스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버리지 못합니다. 로기수가 춤을 출 때 나오는 음악은 특유의 빠른 리듬감을 보여주는데요. 바로 이 음악이 스윙 재즈입니다. 스윙 재즈를 들으면 저절로 몸을 흔들 수밖에 없는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데요. 감상용 재즈 뮤직과 비교해 보면 스윙의 리듬감과 속도는 바로 댄스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이들이 춤을 출 때 나오는 곡도 역시 스윙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곡인 '싱싱싱'이었죠. 이렇게 스윙 키드, 제목이 같은 이 두 영화는 스윙 재즈가 이념과 정치를 초월할 만큼의 매력으로 느꼈던 청년들의 순박한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정치나 이념과 아무 상관도 없었던 청년들이 그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열정에 몸을 맡기는 모습을 통해 청년문화가 갖는 강렬한 힘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1920~40년대까지 유행했던 스윙 재즈의 탄생 배경과 그것이 어떻게 전 세계의 청년들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스윙 재즈의 대표적인 뮤지션인 루이 암스트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920년대 음악에서 모던 걸, 모던 보이 현상과 미디어

1920년대 음악에서 모던 걸&#44; 모던 보이 현상과 미디어
1920년대 음악에서 모던 걸, 모던 보이 현상과 미디어

모던 걸, 모던 보이 현상은 1920, 30년대의 세계적인 공통적 현상이었는데요. 이 청년들이 즐겼던 대중문화들은 도시문화의 주체적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중음악을 비롯해서 패션, 댄스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근대 대중문화는 1920, 30년대 도시문화의 세계적 동시성을 살펴보는 유용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중요한 사회적 현상 중에 모던 보이보다는 모던 걸에 더 집중했던 것은요. 전통사회에서 금기시되었던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아주 새롭고 낯선 현상들로 봤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모던 걸이 소설과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고요. 또 이런 도시 공간의 변모와 함께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변화했던 것들은 이런 모던걸을 주체적인 대상으로 부상한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모던 걸의 직업에는 전화교환수, 버스걸, 백화점 점원 등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직업을 가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여성도 상품의 구매자가 되는 새로운 현상이 삶의 방식이 되고 또 대중 소비사회의 형성과 함께 도시형 대중의 등장을 확장시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이 1920, 30년대의 대중이라는 소비 주체가 국가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새롭게 발견된 현상이기 때문인데요. 이 대중문화는 바로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해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기는 역사와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암울한 식민지를 경험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문화의 계보에서 본다면 근대 대중론의 문맥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고요. 또 이것을 사회적 현상의 한 축으로 바라볼 때는 이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미디어의 개입이었습니다.

미디어의 개입

20년대는 이 미디어가 모든 문화 영역에서 특정한 실정성을 획득해 나갔던 시기였는데요. 특히 라디오를 비롯해서 영화, 당시에는 활동사진이라고 불렀었죠. 이런 영화들이나 신문, 잡지 등과 같은 매체가 대중적 미디어로써 강력한 힘을 형성하고 있었고요. 그 이후에는 신문화나 영화, 광고 등, 이런 메타 언설로 각각의 고유한 사회적 기능을 발휘해 갔습니다. 이런 매체들이 청년들 사이에서 새로운 유행을 형성하고 확산하게 만들었는데요. 유행이란 많은 사람들이 어느 기간 동안 같은 행동을 하는 현상을 말하죠. 관습이라는 것이 지속적이고 고정적인 특성 때문에 개인의 의지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데 반해서 유행이라는 것은 매우 유동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도시 모더니즘의 대중문화를 형성해가는 데 이 미디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요. 왜냐하면 미디어는 동시대의 유행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중요한 미디어였던 라디오

1920, 30년대의 가장 중요한 미디어는 바로 라디오였습니다. 라디오는 요즘의 SNS와 같이 당시 새롭게 뜨는 인기 미디어였습니다. 라디오가 새로운 유행 현상을 이끌면서 대중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독일 히틀러 시대의 선전 장관이었던 '괴벨스'였습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는 구국의 영웅'이란 메시지를 퍼뜨리기 위해 아예 국민수신기라는 76마르크의 값이 싼 라디오를 대량생산해서 독일 가정에 라디오를 보급하는 일에 매진했을 정도였는데요. 그만큼 이 시기의 라디오는 대중에 유용한 선전도구로 이용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매체였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0년대는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시대로 전환되면서 클로즈업이라든가 몽타주 기법 같은 것이 풍부하게 사용되면서 스펙터클한 영화 표현이 가능해졌거든요. 더욱이 수많은 배우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상업주의가 번성해지면서 스타 시스템을 내세운 오락영화가 집중되었죠. 스타덤에 오른 인기 배우들의 패션과 화장 등으로 화려한 외모는 청년들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죠. 새로운 소비문화와 그것을 체현하는 청년들에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것이 바로 할리우드 영화였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외국영화를 보고 나서야 모던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회고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던 청년들이 할리우드에 등장하는 스타들은 실물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요즘 인기 드라마나 영화에 나온 등장인물의 패션을 모방하고 그들이 먹는 음식이 유행을 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죠. 영화 스타들의 헤어스타일라든가 복장, 표정, 포즈 등 모든 것인 이 청년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스타들이자 패션을 선도했던 인물들은 바로 클라라 보우나 루이즈 브룩스 등을 들 수 있는데요. 이들의 캐릭터를 본떠 만든 것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베티 붑이 있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인 이 베티 붑은 1930년대 섹시 심벌로 활동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할리우드 영화계의 섹스 심볼에 마릴린 먼로가 있다면, 애니메이션계에는 이 베티 붑이 있었습니다.

1920년대 플래퍼와 청년 문화

1920년대 플래퍼와 청년 문화
1920년대 플래퍼와 청년 문화

베티 붑 캐릭터의 디자인은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미국 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모던 걸들, 다른 말로 '플래퍼'들이라고도 불렀는데요. 이 플래퍼들을 모델로 삼은 것이 바로 '베티 붑' 캐릭터입니다. 플래퍼들의 패션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함께 전통적 여성의 생활양식을 깨뜨린 과거와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여성 등장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출현한 플래퍼는 당시의 신여성들이 주로 입었던 주름 잡힌 짧은 치마가 회전할 때 넓게 퍼지면서 펄럭대는 모습을 빗대어 붙여진 이름인데요. 이런 플래퍼 룩은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이 긴 머리를 짧게 잘라서 남성과 같은 스타일을 선보인 것이었습니다. 개화기의 한국의 신문과 잡지에서 이 모던걸들을 비난하는 기사들이 등장할 때 또 이런 플래퍼라는 말도 등장하는데요. 개화기 한국의 신문 기사에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모던 걸들을 가리키는 이 플래퍼를 '후랏빠'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유행하던 모던보이, 모던걸의 현상도 바로 192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데요. 1920년대의 세계 경제는 미국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던 시기였죠. 영화에서 비추어진 미국인의 생활 방식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 소비와 쾌락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대중문화가 태동된 시기가 바로 1920년대였는데요. 또 라디오와 할리우드의 영화가 확산되면서 재즈 뮤직이라든가 미국식 생활 풍조가 강조된 영화를 통해서 이런 플래퍼들의 패션도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플래퍼들은 쇼트커트를 하거나 단발머리 위에 군인들의 철모 모양과 비슷한 '클로슈'라는 모자를 썼는데요. 이전에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고 허리를 가늘게 조이며 여성성을 강조했던 전통적 의복 스타일의 개념을 깨고 H라인의 직선적인 디자인이나 여성용 슈트를 입기도 했는데요. 그런 스타일을 '플래퍼 룩' 또는 '가르송 룩'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화장을 진하게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했는데요. 특히 이들의 단발머리는 관습에서 벗어난 여성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모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과거 빅토리아 시대가 규정한 여성미는 전통적인 모성애를 강조하는 성숙한 스타일을 지향했지만, 이 시기에는 키가 크고 마른 소년의 이미지가 자유로운 여성의 이미지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여성들은 과거에 여성에게 금기시되었던 스포츠를 즐기기도 했고요. 또 기업의 비서나 타이피스트와 같은 사무직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미국의 플래퍼들이 있었다면 유럽의 청년문화에도 이때 새로운 풍조가 생겨났는데요. 프랑스에서는 소년 같은 여성을 의미하는 '가르손느', 영국은 '스쿨 보이쉬 걸'이라 불렸던 트렌드세터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유행은 일본을 거쳐서 조선에도 보급되었는데요. 이 시기 조선의 대표적인 플래퍼로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던 무용가 최승희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립적 주체성을 드러내기도 하고요. 또 소비주의 성향 등을 강조하면서 기성세대들에게는 사회적 문젯거리로 통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자유분방한 삶은 음악계와 문학계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플래퍼 룩

여성성보다는 소년스러움을 강조한 이 플래퍼 룩의 특징은 민소매라든가 아니면 허리선이 낮은 직선적인 형태의 드레스를 입어서 활동성이 좋게 한 스타일이 특징입니다. 이런 스타일은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에서 벗어난 혁명적인 실루엣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진한 화장에 머리는 단발머리, 그리고 여기에 어울리는 모자나 머리 장식을 곁들인 스타일은 20, 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든가 영화에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25년에 발표된 스캇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영화로 재현된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1923년 뉴욕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당시에 유행했던 재즈 음악이라든가 또 스피드를 즐겨했던 풍조에 따라서 자동차가 달리는 모습이 많이 보이죠. 그리고 청년들이 함께 모여서 화려한 무대에서 춤추고 술을 마시는 당시 미국 사회의 소비 풍조를 잘 재현해 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이렇게 1920년대는 물질적 번영을 배경으로 한 소비와 쾌락 추구의 시기였던 것이죠. 이 당시의 미국을 보통 재즈의 시대라고도 하고 또 광란의 20년대라고도 부르는데요. 이 '위대한 개츠비'는 당시 유행했던 플래퍼 룩을 잘 재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즈 뮤직을 중심으로 대중문화가 화려하게 꽃 피우기 시작한 20년대의 미국에 젊은이들의 통속적인 문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영화에서 보면 광란의 파티라든가 플래퍼들의 패션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여주인공 데이지의 패션이 바로 클라라 보우나 루이즈 부룩스가 유행시킨 플래퍼 룩을 그대로 재현해주고 있습니다. 플래퍼 룩과 함께 1930년대 여성에게 금기시된 패션을 하나의 유행 아이템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독일 출신이지만 할리우드 배우였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입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남성용 슈트를 입어서 매우 새로운 매력을 선보였는데요. 플래퍼 룩이 소년의 이미지였다면 메니쉬 슈트로 불리는 이 바지 정장은 성인 여성이 남성의 의복을 전유하는 파격적인 스타일을 선보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여성에게 바지는 금기시된 의복이었기 때문에 여성이 바지를 외출복으로 입는 것은 타락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공공건물이나 레스토랑에서 바지를 입은 여자는 출입을 금지했을 정도로 일반 여성이 바지를 입는다는 것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인식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법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여성이 처음 바지를 입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터에 나간 남자들을 대신해서 군수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던 여자들에게 실용적으로 허용되었을 뿐이었는데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긴치마와 코르셋은 자칫 대형 사고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남성용 팬츠 슈트 차림에 가까운 디트리히의 의상은 그때까지 아주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관습을 깨뜨릴 정도로 매우 불온하고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현대에는 여성이 보이쉬한 느낌의 옷을 입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없지만, 당시 마를레네의 복장은 현대의 매니쉬 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가령 디트리히의 판탈롱 슈트는 하얀 담배 연기를 내뿜는 고전적인 이미지를 자신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구축하면서 성적 금기에 도전하는 동시에 새로운 패션의 전통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1930년 디트리히의 첫 할리우드 영화인 '모로코'라는 영화에서 클럽의 가수로 일하는 여성 '에미'가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는 장면에서 처음 선을 보였던 이 메니쉬 룩은요, 당시 수많은 관객의 야유가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도도한 태도와 신비한 매력으로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링컨을 상기시키는 미국식 탑 했을 삐딱하게 쓰고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검은 턱시도를 걸친 디트리히의 패션은 흑백 영화 특유의 색감과 조화를 이루면서 고전적 매니쉬 룩의 원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나중에 이 의상은 디트리히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면서 전 세계 여성복 디자인의 혁신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또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디트리히는 군복을 입고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요. 이 디트리히의 군복 취향은 당시 전쟁을 독려하는 분위기를 타서 적극적으로 장려되기도 했지만요,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 여성이 남성의 의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권장될 만한 사항이 아니었죠. 하지만 디트리히의 매니쉬 한 여성용 슈트 패션은 점차 대중의 심미안을 매혹하면서 새로운 매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서구 청년들이 유행시킨 패션은 경성에도 도착했습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이런 청년들의 복장을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하면서 비판하는 기사가 많았는데요. 1920년대 만화가 안석주는 삽화를 통해 “젊은 청춘 남녀들이 분수도 모르고 멋 내기를 한다”라고 야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대중문화의 출발과 발전은 대개 각 시대에 존재했던 청년들이 주도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청년들의 대중문화의 흐름과 발전에 있어서 청년들은 늘 중요한 주체였고요. 또 그런 점에서 기존 질서나 관습을 깨뜨리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왔던 것은 언제나 청년들이었음을 이런 스토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죠.

대중문화 감성과 청년 문화 담론

그런 점에서 대중문화의 감성은 언제나 청년 문화 담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중문화는 청년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청년들의 감성이 반영되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어떤 시기에 어떤 청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대중문화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청년 문화는 기성세대들이 만든 질서에 반감을 가지거나 또 기성세대 가치관에 대항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이 만든 대중문화는 대항문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죠. 각 시기마다 새롭게 등장했던 음악 장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보게 될 재즈, 로큰롤, 힙합과 같은 음악들을 보면요. 그것을 만들어간 청년들이 가졌던 대항적 느낌,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성 질서에 반기를 들고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문화의 성격을 바로 카운터 컬처, 대항문화라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1920-1930년대에 등장한 모던 청년들이 어떻게 새로운 존재들이었는지, 그들이 만들어간 새로운 매력으로 대중문화가 어떤 흐름을 거치고 등장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현대의 대중음악이 어떤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비밥 재즈 등장과 특징(찰리 파커)

비밥 재즈 등장과 특징(찰리 파커)
비밥 재즈 등장과 특징(찰리 파커)

비밥을 '밥'이라고도 하고 '비밥'이라고도 하는데요. 이 비밥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밥 재즈'를 노래 부를 때 사람들이 '비비비 밥밥밥' 또는 '비밥 비밥'하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즉 노래할 때 '라라라', 이런 것처럼 뜻 없이 곡조에 맞추어서 부르는 음절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밥의 탄생은 흑인 뮤지션들이 스윙 재즈에서 재즈 특유의 특징이 엷어진 것에 불만을 가지고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를 구축하면서 그 이전에 있었던 어느 재즈보다도 아프리카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했던 이 신세대 흑인 뮤지션들이 지향했던 것은 진짜 예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만의 즉흥 연주, 또는 나의 개성이 반영된 예술을 하고 싶어 했던 것이었죠. 그런 모색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밥은 코드 진행이 복잡하고 멜로디가 역동적이면서 거칠고 빠른 템포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래서 스윙이 4박자 위주였던 데 비해서 비밥은 조금 더 빠른 8박자를 기본으로 하고요. 어떤 때는 16박자까지 쪼개서 연주하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게 들리고 심지어는 괴상하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연주를 매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비밥은 재즈 뮤직 역사에서 스윙과 같은 댄스 음악에서 감상을 위주로 한 음악으로 전환되는 느낌을 줍니다. 처음 이 비밥을 들으면 조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수많은 스윙 재즈의 팬들도 이 비밥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비밥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이런 대중뿐만 아니라 비평가들이라든가 연주자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무언가 새로운 느낌의 고도화된 연주 실력을 과시하는 뮤지션이 등장하게 되면서 결국 비밥은 모던재즈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재즈 장르로 급부상하게 되죠. 빅밴드의 스윙 재즈 형태가 아티스트가 아닌 연예인 같은 느낌을 준다면 신세대 흑인 뮤지션들은 이런 댄스클럽이 문을 닫고 나서 복잡한 코드와 음계를 활용해서 어렵게 만든 것을 누가 누가 잘하나, 내기를 하면서 자신들의 연주 실력을 뽐내는 연주 배틀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클럽이나 술집이 영업을 끝내고 난 뒤 문을 닫고 나서 신세대들이 그 안에서 연주를 했다고 해서 '애프터 아워즈'라고 부릅니다. 한국에도 '애프터 아워즈 비밥 밴드'라는 이름으로 연주하는 재즈 뮤지션들도 있죠. 이 시기에 이런 젊은 재즈 뮤지션들이 이런 잼 세션을 했던 유명한 곳이 바로 '민턴스 플레이 하우스'라는 클럽이었습니다. 이들은 빅밴드 스윙 재즈의 연주에서 벗어나서 스스로 자유롭고 실험적인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갔던 거죠.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실험적인 연주를 해야만 하는 어떤 계기가 생겨나게 되었고요. 또 이런 식의 연주가 즉흥성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비밥인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 비밥이 등장하면서 재즈의 판도도 완전히 바뀌었다는 데 있습니다. 연주의 즉흥성이 강조되다 보면 연주자의 개성이 폭발하게 되고요. 또 누가 그 즉흥성과 폭발성을 더 멋있게 구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 연주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신세대 청년 뮤지션들이 만들어낸 이런 새로운 장르는 로큰롤이 탄생하기 직전까지 가장 젊고 파격적인 음악이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비밥이었던 거죠. 요즘 우리가 재즈 하면 떠올리는 4, 5명 정도의 소규모 밴드 구성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방식도 바로 이 비밥에서 보편화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윙재즈의 빅밴드보다는 조금 작아진 구성인 것이죠.

스윙재즈와 비밥재즈의 차이점

춤곡의 성격이 강한 스윙재즈와 감상용 성격이 강한 비밥재즈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려고 하는데요. 첫 번째 곡은 베니 굿맨의 '렛츠 댄스'로써 스윙재즈의 대표적인 곡이고요. 두 번째 들을 곡은 찰리 파커의 'Anthropology'라는 비밥의 대표곡을 한번 감상해 보시겠습니다. 비밥을 선도했던 재즈 뮤지션 중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입니다. 찰리 파커는 비밥 재즈 시대를 연 뮤지션으로 평가되는데요. 비밥 재즈는 초기부터 매우 특이하고 독창적인 성격이 강해서 대중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비밥은 재즈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장르인데요. 음색이 조금 강하고 자극적이면서 템포가 엄청 빠르거든요. 그래서 율동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조금 난해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예술성이 강해서 대중적인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방송 출연은 조금 어려웠고요. 또 레코드 취입도 늦게 되어서 1945년이 되어서야 레코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던재즈의 유형은 이 비밥에서 다 나온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도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 비밥입니다. 세션 형태로 연주되는 이 비밥에서는 재즈의 본질인 즉흥성이 강조되고 또 리듬 파트가 부각됩니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단순한 타임키퍼 역할만 했던 드럼이 멜로디 악기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것도 이 비밥 재즈의 특징으로 거론됩니다. '세션'이라는 것은 프로 연주자들중에서 정식 멤버는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서 의뢰를 받아서 연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관현악단 연주자를 세션이라고 하지는 않고요. 보통 록밴드나 스쿨 밴드의 연주자를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죠. 여기에 포함되는 포지션은 아주 다양하지만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 보컬리스트들이 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들은 고정 멤버가 아니기 때문에 라이브 공연이나 녹음 세션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밥 재즈의 창시자 - 찰리 파커

비밥 재즈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찰리 파커 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두 편이 있는데요. 하나는 '위플래시'이고 또 하나는 찰리 파커의 음악 인생을 그린 '버드'라는 영화인데요. '위플래시'는 완벽한 밴드와 연주를 위해 최고의 실력을 짜내려고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플레처 교수와 또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손바닥이 갈리질 정도의 연습을 하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학생 앤드류 사이의 애증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인격적인 모독을 가하는 플레처 교수에게 대항하는 앤드류한테 플레처 교수가 이렇게 말하죠. “그렇게 해서는 찰리 파커가 되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거듭 반복되는데요. 이때 찰리 파커의 이야기는 두 사람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트리거가 되죠. 여기서 플레처 교수가 이야기하는 찰리 파커는 비밥 재즈의 개척자로 잘 알려져 있는 재즈 뮤지션인데요. 플레처 교수가 찰리 파커를 완벽한 천재 뮤지션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 장면들을 통해 알 수 있죠. 평소에 플레처 교수는 학생들 중에 찰리 파커가 나오지 않는 것은 스타벅스의 재즈만 듣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완벽주의자인 플레처 교수가 학생들에게 찰리 파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그만큼 찰리 파커가 완벽한 천재 뮤지션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심지어 또 다른 모던 재즈계의 전설로 알려진 마일즈 데이비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요. 재즈의 역사를 네 단어로 말할 수 있다면 루이 암스트롱과 찰리 파커다, 이런 말을 하기도 할 정도로 찰리 파커는 그만큼 재즈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뮤지션입니다. 또 다른 영화는 찰리 파커의 전기 영화인 '버드'라는 영화인데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찰리 파커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시작됩니다. 1950년대부터 서부극, 웨스턴우드 영화에서 활약한 유명 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재즈 팬으로도 유명한데요. 찰리 파커의 전기 영화를 감독했다는 것만으로도 재즈계에서 찰리 파커의 위상을 가늠할 수가 있죠. '버드'라는 영화는 찰리 파커의 전기 영화로도 인정받는 웰메이드 영화인데요. 이 영화의 첫 장면에는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인생을 개척해 갈 어린 찰리 파커의 유명한 일화로 시작됩니다. 찰리 파커는 10대 때부터 생계를 위해 클럽의 무대에서 연주를 시작했는데요. 재즈가 아무리 자신의 개성을 담은 즉흥 연주라고 하더라도 다른 악기들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연주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 무대의 드러머는 당시 카운트 베이시 악단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던 조 존스라는 사람이었어요. 조 존스의 드럼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듯이 혼자서 현란한 색소폰 연주를 이어가니까 드러머인 조 존스가 아마 찰리 파커에게 화가 났던 모양이죠. 그래서 조 존스가 드럼에 달려있던 심벌즈를 내던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영화에서는 심벌즈가 날아가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일화는 그만큼 찰리 파커가 어린 시절부터 현란하고 개성 있는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즉흥연주를 위해 갖추어야 할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배 뮤지션에게 굴욕을 당하고 나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누구보다 더 열심히 연주 실력을 갈고 닦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로 해석되면서 찰리 파커의 천재성을 부각시키는 신화로 오늘날까지 남고 있습니다. 1920년생인 찰리 파커는 1901년생인 루이 암스트롱보다 19살 어린 신세대 재즈 뮤지션이었는데요. 그러니까 2020년은 찰리 파커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찰리 파커는 1920년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는데요. 11세 때에 색소폰을 시작한 찰리는 1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해 연주를 했는데요. 매일 15시간씩 연습을 했고 즉흥 연주도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찰리는 무대에 자주 섰는데요. 즉흥곡을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에 연습을 안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남들이 몇 주에 걸쳐서 연습할 곡을 공연 전에 와서 잠깐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다른 연주자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찰리는 노력의 대가라기보다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찰리가 연주할 때 쓰는 음들과 프레이즈를 조합하는 방식은 아주 독특했는데요. 상식을 뒤엎는 획기적이고 기괴한 방식이었습니다. 2차 대전 직후인 40년대 후반~1950년대에 유행한 모던재즈의 첫 번째의 장르로 비밥재즈의 특징과 비밥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찰리 파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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