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로큰롤에 열광했던 이유

청년들이 로큰롤에 열광했던 이유
청년들이 로큰롤에 열광했던 이유

로큰롤을 청년들이 왜 그렇게 로큰롤에 열광했을까요? 전후에는 일단 냉전의 위세가 극에 달했던 미국의 보수적인 백인 어른 세계가 일단 전제되어 있었고요. 백인 어른 세계들이 다 기성 질서, 기성세대들이 듣는 음악이라는 것은 이 청년들에게 굉장히 낡은 사운드로 비쳤습니다. 게다가 어른들이 항상 요구하는 어떤 덕목이란, 미덕이라는 것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엄마, 아빠 말을 잘 듣고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를 잘 지켜서 모범적인 미국 시민이 되는 것, 그런 것들이었잖아요. 그런 것들이 청년들이 받아들일 때는 굉장히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라고 생각을 했고 그런 어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낸 질서에 우리가 적응해야 되는 그러니까 우리가 맞춰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 것들이 바로 청년들이 미국 사회가 주는 억압적인 분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빌 헤일리가 등장을 해서 엉덩이를 막 흔드는 춤을 추게 된 거죠. 기타 사운드가 크고 강렬하고 그러면서 빌 헤일리가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것이 당시의 기성세대들이 볼 때는 매우 음탕한 것처럼 비춰졌습니다.비쳤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이 TV에 나와서 엉덩이를 흔든다라는 것은 어른들이 볼 때 예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청년들이 볼 때는 빌 헤일리의 엉덩이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엉덩이춤이 너무나 새롭고 신선하고 자유로운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미국 사회의 어떤 보수적인 분위기가 이런 로큰롤의 흥겨운 리듬과 어떤 육체적 쾌락을 암시해 주는 엉덩이춤, 이런 것들이 학생, 청년들에게는 되게 매료가 되었던 것들이죠. 특히 백인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은 출세, 교육, 도덕, 이런 것들을 권장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무언가 반체제, 반사회적인 그런 개인주의 성향들을 보이는 일군의 그룹들이 생겨났는데요. 이 그룹을 비트족이라고 합니다.

비트족의 등장배경

생각보다 부모님 말씀을 잘 안 듣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리고 무언가 사회적인 질서에 혼용되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서 무언가 고독을 즐기고 나 혼자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이런 청년들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비트 족을 어른들이 봤을 때는 조금 이상하게 비쳤죠. 이해할 수 없는 청년들, 그리고 이런 풍요로운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그것을 즐기지 않는 이상한 아이들이라고 생각이 됐죠. 그래서 이 비트 족은 전례 없는 전후 미국 사회의 소비 열풍 속에서도 오히려 혼자서 모터사이클 여행을 한다거나 아니면 성 해방을 외친다거나 그러면서 음탕한 춤을 추면서 기성의 금지된 질서에 도전했던 그룹들입니다. 이들이 생각할 때 미국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고작 출세와 성공을 위한 규칙적이고 수동적인 삶의 자세를 강요받는 것일 뿐 거기에 베트남 전쟁과 같은 명분 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을 한다든가 아니면 성공을 꿈꾸기 위해서 청년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실망과 허무감이 짙게 배어 있는 어떤 분위기였죠. 그래서 전후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미국 사회가 강요하는 그런 순응의 미덕에 의지해 봤자 기대할 만한 신념 같은 것은 어디에도 있지 않고 또 그런 것들을 지키면 지킬수록 청년들에게는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아이젠하워가 집권했던 50년대의 미국 사회는요.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 원자 폭탄보다 더 강력한 수소 폭탄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고요. 또 메카시즘에 의한 사상 통제를 강요하면서 이데올로기 분위기가 굉장히 엄격하게 있었고 그러면서 소득 재분배를 통해서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격차를 줄여가면서 풍요로운 소비 사회가 창출되고 있었습니다. 1945년에서 1961년까지 미국의 GNP는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로 증가할 정도로 굉장히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요. 그만큼 실업률은 매우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러면서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또 교외 주택, 화려한 주택들이 건설되면서 건설 붐을 이루었고요. 그런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가운데 새로운 구매력을 갖춘 대중들이 발생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부모들은 주말마다 쇼핑몰로 차를 몰고 가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 준다거나 또 성인과 어린이들을 위한 유행 상품이 끊임없이 공급되었고요. 또 아버지는 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주고 어머니는 걸스카우트 모임에 딸을 배웅한다거나 저녁에는 모두 거실에 모여서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건전한 삶을 강조하는 TV 프로그램을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풍조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풍습, 모습, 풍경들은 여러분,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접했던 것들이죠? 그래서 록을 하는 뮤지션들이 혐오하는 풍경이 바로 이런 미국 중산층의 질서이기도 하고요. 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도시화와 산업화는 그런 전통적인 미국 사회 공동체를 소멸시켜가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떤 대도시에서 익명의 삶을 살면서 공장이나 사무실과 같은 틀에 박힌 공간에서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죠. 그런 와중에 짐 크로우 법이라는 흑인과 백인의 분리 정책에 의한 차별 정책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인이 누릴 수 있는 공간, 백인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정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의 경제 수준은 미국의 경제 수준이 급속하게 상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의 경제 수준은 나아질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런 10대 청년들은 개인적 자유가 소멸되어 가는 사회 풍조에서 자신들의 삶이 억압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기성세대들의 획일화된 사회 규범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왔겠죠. 그 출구가 바로 대중음악이었습니다.

대중음악과 청년들

청년들을 둘러싼 일상생활과 사회적 환경에 대한 반항, 저항 의식, 이런 것들이 가장 일상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던 것, 그것을 바로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의 특수한 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백인 사회의 규범에 동화될 수 없었던 흑인들은 또 어땠을까요? 또 흑인들은 그들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의 음악들을 창출했겠죠. 여러분이 좋아하는 힙합 음악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원래 리듬 앤 블루스는요. 흑인 특유의 블루스에다 리듬을 붙인 것을 말하거든요? 이런 리듬 앤 블루스에다가 전통 재즈 스타일인 부기 우기를 열정적인 리듬 앤 블루스와 결합한 것, 그것이 바로 로큰롤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로큰롤은 흑백 음악의 통합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로큰롤이란 일렉트릭 기타로 강렬한 리듬을 내면서요. 블루스를 연주하는 음악을 말하는데요. 그러니까 바로 태생 자체가 흑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이 도시화하면서 조금 더 빨라진 음악, 그것이 바로 로큰롤입니다. 사실 로큰롤이 언제 탄생한 것인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로큰롤은 이미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었고요. 또 그것이 대중 연예 산업에 어떤 상업적 계산과 맞물리면서 광범위한 잠재적 고객에게 유통 가능한 상품이 되었던 것, 그것이 바로 1950년대라고 할 수가 있겠죠. 이렇게 로큰롤은 젊음과 낭만, 반항과 같은 대중들이 매혹될 만한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와 같은 그런 반항적 이미지를 가진 남자 배우들이 그 분위기를 또 선도했었죠. 이렇게 어떤 권태, 굴종, 비겁함, 이런 부정적인 분위기들을 낳은 기성세대들에 대한 반항의 이미지를 구현했던 것이 바로 이 제임스 딘과 말론 브란도와 같은 영화배우들이었는데요. 그와 함께 거기에 더해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그런 화려한 춤사위에 화려한 패션 이런 것들이 함께 가미되면서 대중의 요구, 특히 청년들의 요구에 가장 들어맞는 이미지가 구현되었던 것이죠. 여기까지 로큰롤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로큰롤 뮤직의 역사(로큰롤의 아버지 - 척 베리)

로큰롤 뮤직의 역사(로큰롤의 아버지 - 척베리)
로큰롤 뮤직의 역사(로큰롤의 아버지 - 척베리)

백인 음악으로 간주되었던 경쾌한 컨트리 뮤직에다가 흑인의 블루스를 결합한 것이 로큰롤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이런 로큰롤이 특이한 점은 그동안 돌려서 말하는 노래방식, 발라드 같은 예쁘고 아름다운 노래들은 무언가 메시지를 돌려서 말을 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죠. 하지만 로큰롤은요. 로큰롤을 즐기는 청년들은 자신들만의 유희라든가 어떤 성 문화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런 로큰롤 뮤직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접하지 못했던 음악이었죠. 그래서 로큰롤 뮤직이 등장하자마자 흑인이건 백인이건 모든 청년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로큰롤 뮤직은요. 흑인과 백인, 또 세속과 신성의 경계라든가 사회 통념을 붕괴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춤에 대한 열정을 이끌어내면서 남녀 청년들이 부비부비 춤을 추게 됐죠. 또 기성세대들에게 이런 남녀 청년들의 부비부비 춤이 성적 쾌락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래서 로큰롤을 저속하고 부도덕한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의미에서 이런 로큰롤은 지금까지 안전하고 완벽하다고 간주되었던 미국 중산층의 라이프스타일을 단박에 흔들어버린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성 질서의 고루함이라든가 안일함에 비해서 척 베리라든가 제리 리 루이스의 로큰롤의 경쾌한 리듬은 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했죠. 이들에게 기성 백인 대중음악, 주류 음악은 소비 주의를 대변하는 억압된 사회를 상징했습니다. 반면에 비주류, 비대중적인 흑인 음악은 상대적으로 무언가 진정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소비 자본주의에 적합한 상업적 음악이었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 음악이었던 흑인 음악은 로큰롤처럼 뭔가 진정한 것으로 비쳤던 것이죠.

로큰롤들의 주인공 - 척 베리

로큰롤들의 주인공은 바로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들 수 있겠죠. 거기에 앞에서 이야기했던 빌 헤일리의 Rock Around The Clock이 중요한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음악은 청년들에게 어떤 파편화되고 무감각한 인간을 양산하는 도시의 기계적 삶에 대한 일탈 그리고 기성 질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부모 세대에 대한 응답으로 돌려주었던 것이죠. 특히 척 베리는 로큰롤 뮤직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기타리스트이자 재즈 연주가인데요. 특히 로큰롤 기타 연주의 전형을 확립한 장본인으로 평가됩니다. 사실 엘비스가 등장하기 이전에 로큰롤을 히트시킨 선구적인 뮤지션이라는 의미에서 로큰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척 베리는 음악으로 흑백의 화합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대중음악사에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흑인음악과 백인 음악 분리를 깬 로큰롤

흑백 차별 정책, 흑백 분리 정책을 상징하는 짐 크로우 법이 위세를 발휘했던 50년대의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은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는데요.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흑인 음악을 부르고 연주하는 백인은 있었지만 백인 음악을 하는 흑인 뮤지션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척 베리가 이 보이지 않는 금기를 깬 최초의 로큰롤 싱어송라이터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척 베리의 대표적인 로큰롤 뮤직은 바로 Maybellene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Maybellene은 최초의 흑인 로큰롤 스타, 척 베리의 역사적인 첫 싱글입니다. 이 Maybellene이 등장한 이후에 모든 로큰롤 뮤지션들은 기타 연주에 관한 한 모두 척 베리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는 비틀스가 이 척 베리의 곡을 즐겨서 카피했고요. 또 롤링스톤스가 그의 곡을 커버한 Come on으로 데뷔한 적이 있죠. 또 비치보이스와 밥 딜런도 그의 기타 연주를 자주 빌려다 썼고요.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로큰롤의 역사는 척 베리가 이 역사적인 싱글, Maybellene을 녹음했던 1955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팝 계의 정설입니다. 척 베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오리걸음이거든요. 다리 하나를 들고 기타를 연주하는 쇼맨십은 리틀 리처드라든가 제리 리 루이스,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10대의 감성을 담은 세심하고 예리한 가사와 독창적인 음악 그리고 독보적인 제스처는 로큰롤다운 것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됩니다. 흑인처럼 노래를 부른 엘비스 프레슬리도 또 컨트리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룬 레이 찰스도 Rock and roll 뮤직을 커버한 비틀스도 이렇게 척 베리에게는 다들 채무자라고 할 수 있겠죠. 또 흑인의 블루스와 백인의 컨트리가 잉태한 로큰롤은 척 베리를 통해서 거대한 흑과 백의 진정한 협치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척 베리에 대한 평가들

존 레넌은 척 베리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만약 로큰롤에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척 베리일 것이다. '라고까지 그 로큰롤과 척 베리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 줬고요. 또 밥 딜런도 이런 말을 했죠. '척 베리는 로큰롤 음악계의 셰익스피어다. ' 그만큼 로큰롤 음악계에서 척 베리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비견될 정도로 큰 존재인 것이죠. 그런데 이 척 베리는 2017년에 세상을 떠났는데요. 그때 빌보드지는 이 척 베리의 로큰롤 장르를 칭송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척 베리는 로큰롤을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로큰롤을 세상을 변화시키는 태도로 그 형태를 바꿔 놓았다.” 이런 빌보드지가 이야기하는 척 베리의 업적은 그만큼 로큰롤 뮤직과 척 베리의 관계를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죠. 척 베리의 곡 가운데서도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곡이 바로 영화 Back To The Future에 소개되어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로큰롤의 탄생 배경

로큰롤의 탄생 배경
로큰롤의 탄생 배경

어떤 음악은 세대의 감성을 잘 반영해 주는데요. 그래서 음반 기획사에서 작사, 작곡하고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연주가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청년들이 자생적으로 신나서 즐겁게 부른 노래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호응을 얻었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세대 의식이 반영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로큰롤이 전형적인 그런 음악입니다. 먼저 로큰롤이 탄생한 배경을 좀 살펴보자면 1950년에 대표적인 대중가요, 대중음악이라고 할 수가 있죠. 또 그리고 로큰롤을 직접적으로 즐기고 했던 세대들이 비트 제너레이션인데요. 1950년대의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장르가 로큰롤이고 그것을 즐겼던 세대들이 비트 제너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큰롤이 등장하는 시대상

로큰롤은 2차 대전 직후에 탄생한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인데요. 2차 대전은 승전국인 미국의 유례없는 경제 번영을 이루었죠. 미국의 기성세대들은 물질적 풍요와 안정 속에서 중산층의 규범과 가치를 내세우며 가족 중심적인 질서를 확립해 갔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학교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해서 출세하고 세속적인 성공을 누릴 것을 요구했죠. 그런 것들을 아이들은 항상 억압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죠. 그렇게 경제적인 풍요와 안정된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때 미국 중산층의 삶을 라이프 스타일을 가꾸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산층의 삶이 하나의 어떤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얼마 안 됩니다. 바로 1960년에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죠. 물론 그 이전부터 1950년대는 흑인 인권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때였죠?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마틴 루터 킹이라든가 말콤 X, 이런 흑인 인권 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암살을 당하기도 하고요. 또 젊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을 당하게 되죠. 이런 안정된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믿었던 청년들에게 이런 사건들은 굉장한 배신감과 충격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렇게 당시 5, 60년대의 미국 사회는 베트남 전쟁과 흑인 인권 운동 그리고 그러한 사상과 지식인의 자유를 위한 투쟁 등 다양한 반권 위주 의의 흐름을 통해서 그런 청년문화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중음악과 청년 문화의 관계가 굉장히 특수한 관계를 이루는 이유는 청년들의 저항 의식, 청년들의 반사회적 의식이 일상적 영역에서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로큰롤 등장

먼저 로큰롤에서 로큰롤이라는 어휘는 1951년에 나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디스크자키였던 앨런 프리드가 다양한 인종의 청취자들에게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을 틀기 시작할 때 이 곡이 어떤 곡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로큰롤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은 라디오 방송이 굉장히 활발하게 이루어져 있죠. 채널도 굉장히 많고 그래서 채널이 흑인 음악, 백인 음악 그리고 어른들이 듣는 음악, 이렇게 전문화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이 앨런 프리드가 새로운 음악, 1950년대에 나온 새로운 음악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로큰롤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 시작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로큰롤이 보편적이고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 조금 더 중요하겠죠. 이 로큰롤이라는 음악이 처음으로 청년들 사이에 큰 히트를 한 것은 바로 55년에 개봉된 영화, 폭력 교실로 인해서였습니다. 한국에는 폭력 교실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요. 원제목은 블랙보드 정글이죠. 이 폭력 교실이라는 영화에서 Rock Around The Clock이라는 음악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음악이 전형적인 로큰롤이거든요. 그래서 청년들은 그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이 탄생했다는 생각을 갖고 이 음악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게 되고 급기야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하면서 이때부터 로큰롤 붐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로큰롤이라고 할 때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을 부르면서 화려한 나팔바지를 입고 하체 춤을 추었던 그 장면이 먼저 떠오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Rock Around The Clock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빌 헤일리는 최초로 로큰롤을 히트시킨 역사적인 뮤지션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죠. 특히 이 영화, 1955년에 개봉된 영화 블랙보드 정글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삽입된 음악과 그리고 그 영화에 등장하는 청년들의 패션이라든가 폭력적인, 공격적인 모습들에 대중들, 특히 청년들이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로큰롤 붐이 확산되게 됩니다. 이 Rock Around The Clock은요. 1955년 무려 8주 동안이나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하고요. 음반도 166만 장 빅히트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과 로큰롤에 열광한 이유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과 로큰롤에 열광한 이유
엘비스 프레슬리 등장과 로큰롤에 열광한 이유

척 베리 말고도 또 로큰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수가 바로 엘비스 프레슬리 죠.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스가 등장하기 직전, 50년도에 등장한 대표적인 미국의 가수인데요. 존 레넌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엘비스가 나타날 때까지 그 무엇도 내게 영향을 준 것이 없다. ' 그런 의미에서 엘비스 프레슬리는 지금까지도 로큰롤의 황제라고 불리고 있죠. 척 베리가 로큰롤의 아버지라면 이 엘비스 프레슬리는 로큰롤의 황제, 로큰롤의 붐을 가장 정점으로 끌어올린 가수라고 할 수 있겠죠. 미국 내에서만 1억 장의 음반을 판매했고요. 또 88장의 골드 레코드와 45장의 플래티넘 레코드를 기록해서 영, 미 차트를 통틀어 31곡의 No. 1곡을 보유하고 있는 기록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죠. 1954년 7월 5일은 엘비스의 로큰롤이 탄생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 레코드사 스튜디오에서 엘비스의 첫 싱글, That's Alright Mama를 녹음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트럭 운전사에서 로큰롤의 황제로 팝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신을 이룬 날이죠. 가난한 트럭 운전사로 살면서 어머니의 생일선물을 고르기 위해 레코드 점에 들어간 엘비스가 바로 운명이 바뀐 날입니다.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가 이날 엘비스의 정식 오디션을 봤다고 하는데요. 이날 엘비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특유의 섹시한 몸짓과 창법으로 That's Alright Mama를 열창해서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이 음악이 컨트리인지 블루스인지 모를 독특한 음악을 부른 엘비스에게 또 흑인인지 백인인지 모를 기묘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엘비스에게 매료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오디션으로 곧바로 선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을 했고요. 그렇게 부른 That's Alright Mama가 첫 싱글로 발매되었을 때 세상은 로큰롤의 전성시대가 되었습니다. 엘비스는 1950년대 미국의 당대 최고의 섹시가이로 알려져 있죠. 또 엘비스의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주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습니다. 마치 길거리의 불량배가 포효하는 사운드를 보여줬고요. 게다가 어른들이 너무 싫어하는 하체를 흔들어대는 과격한 댄스로 청년들의 인기를 끌어당겼죠. 그런 엘비스의 포효는 우리만의 사운드를 갖겠다는 일종의 포부였습니다. 백인 중산층의 사운드라고 알려져 있는 그런 기존 사운드를 기성세대의 사회 가치와 동일시하고요. 그것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의식과 가치를 노래한 것이죠. 그래서 안정되고 길들여진 사운드 패턴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은 예쁜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로 이루어진 사운드가 아니라 뭔가 폭발적이고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댄스를 보여주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 패턴을 보여준 것이죠. 그리고 로큰롤 붐을 일으킨 주인공은 바로 빌 헤일리 죠. 오히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로큰롤을 먼저 히트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1954년 4월 12일 데카 레코드 스튜디오에서 탄생한 곡이 바로 Rock Around The Clock입니다. 원래 Bill Haley & His Comets라고 해서 이 밴드가 로큰롤 최초로 히트곡을 남겼는데 그게 바로 Rock Around The Clock이죠. 하지만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생소한 노래가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익숙해지기까지 그리고 자꾸만 흥미로운 음악 소리가 되기까지는 1955년에 개봉된 영화 블랙보드 정글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큰롤 열광의 시작

블랙보드 정글도 사실 50년대의 어떤 영화사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중요하게 거론되는 영화 중의 하나인데요. 왜냐하면 이 블랙보드 정글에 나오는 청년들이 굉장히 충격적인 모습을 미국 사회에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삽입된 노래가 바로 Rock Around The Clock이었고요. 그 영화에서 다루어진 학교 폭력 문제는 그전까지 미국 사회는 안전하고 안정한 사회라고 간주되었던 미국 사회의 어떤 사고방식을 깨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영화로 기성세대들은 엄청난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요. 더욱이 그 영화에 삽입되었던 빌 헤일리의 음악은 새로운 음악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거기에 대중이 매료되면서 빌 헤일리를 일약 로큰롤의 선구자로 만들어버립니다. 빌 헤일리는 'Rock Around The Clock, 한 곡으로 늦깎이 아저씨들이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10대의 대변자가 되어 있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빌 헤일리 콘서트는 정말 10대 청소년들로 가득했고 전 세계 반항아들이 이런 가죽 재킷에 이름을 새기고 다녔는데요. 이 풍습은 말론 브란도의 폭주족 이미지를 모방한 것입니다. 이런 청년들에 대해서 대중매체에서는 로큰롤이 굉장히 폭력과 선정성을 띠었다고 그리고 공격적인 음악이라고 평가하면서 로큰롤 스타일이 반항적 이미지로 고착되는 데에 한몫을 하게 되죠. 제임스 딘이라든가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긴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서 부모들은 경악하기도 했고요. 또 청바지와 가죽 재킷을 입고 담배를 입에 물고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로큰롤 춤에 열광하는 청소년들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됩니다. 또 오픈카를 타고 다니면서 연애를 한다거나 하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과 새로운 청년 문화의 바람을 새로운 상상력과 함께 더불어서 반항과 자유의 분위기가 바로 서구의 청년 문화의 주류가 된 것이죠. 이런 분위기를 가장 먼저 눈치챈 쪽은 바로 음반 시장입니다. 드디어 10대가 새로운 황금 시장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10대의 구미에 맞춘 상품들, 즉 상표가 붙은 가죽 재킷이라든가 이런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가 입고 나온 티셔츠, 마블 만화책, 할리우드 바람둥이들처럼 자동차를 타고 멀리 떠나는 그런 것들이 10대 문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로큰롤은 50년대의 새로운 10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고요. 그런 만큼 로큰롤이 바로 문화 혁명을 주도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50년대는 짐 크로우 법, 즉 흑백 분리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죠. 이럴 때 이 흑백분리 정책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10대들에게 백인적인 것, 흑인적인 것은 무언가 다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는데요. 이 10대들에게 백인적인 것이라는 건 무언가 치열한 경쟁, 개인주의 그리고 획일성, 이런 것들을 표상하는 것이었다면 이들에게 흑인적인 것은 무언가 백인의 서구 문명이 상실해 버린 자연성, 공동체 정신, 이런 것들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서구의 지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적, 합리적 사고와 대립되는 것으로써의 원시주의적 스펙터클이라는 흑백 문화를 경외하는 느낌, 분위기가 생긴 것이죠. 그래서 로큰롤이 어떤 흑인 성을 전유하려 했던 측면, 바로 그것은 흑인과 백인, 우월함과 열등함, 이런 것을 전복하는 반사회적, 반체제적인 미학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백인 10대들은 흑인 음악을 듣고 연주하고 춤추면서 자신들의 사회적 고립이나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면서 하얀 흑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이 하얀 흑인, 화이트 니그로라는 말은 책 이름인데요. 노먼 메일러라는 작가의 책 이름인데요. 어른들이 볼 때 내 아이는 백인인데 백인의 문화, 백인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흑인의 문화를 추구하고 흑인의 문화를 즐겨하는 것에 대해서 하얀 흑인이 되고 싶어 하는 그 모습에 대해서 굉장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대들의 대항문화

그렇게 이런 식의 10대 청년들이 억압적인 기성 사회로부터 이탈하고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행동 양식들을 50년대에 시어도어 로작이라는 사람이 대항문화, counterculture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이 counterculture는 우리가 지금도 청년 문화에 있어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어휘입니다. 노먼 메일러의 화이트 니그로, 하얀 흑인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이성과 관념보다는 본능과 감정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고요. 어떤 인간으로서 자신을 창조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기 위해 직관, 감정, 상상력, 독립성 이런 것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 사회에서 조직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이 순수한 자기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회로부터 오히려 소외될 수밖에 없죠. 자기가 자신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으며 또 그런 위협을 감수해야만 하죠. 그런 위험과 소외는 결국 개인의 자아 발견이라든가 어떤 성장을 가져온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개인의 자아 발견과 성장은 의식의 개혁을 가져오게 되고 그 개혁이 바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청년들은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먼 메일러의 화이트 니그로, 하얀 흑인은 개인의 의식 개혁을 통한 사회 변화를 꿈꿨던 청년의 어떤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국의 청교도 윤리라든가 자본주의 체제, 과학 기술의 발전, 관료주의, 획일주의, 황금만능주의 사상 등은 사실 미국 사회를 경제적 번영으로 이끈 원동력이기는 했지만요. 사실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이런 사회 기풍이 인간의 생존 권리라든가 소망을 유린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고요. 이것이 인간의 생존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개인은 위축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청소년들은 경험하게 됐죠. 따라서 개인의 순응을 요구하면서 이성을 절대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떤 자신의 본능, 감수성, 감각, 이런 것들은 무시, 도외시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그래서 이런 억압적인 사회에 저항하고 인간적이고 예술적인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창조한 인물이 바로 노먼 메일러의 화이트 니그로입니다. 그래서 이 화이트 니그로는 뒤틀리고 왜곡된 어떤 현대 사회의 모순, 그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성격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게 됩니다. 노먼 메일러의 책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요. 한번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8세나 28세로 보이는 마치 커다란 버섯 같은 머리를 한 청년 백인 가수가 선 라의 우주적 음악과 왕벌의 비행 사이에서 은하계를 넘나드는 것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그의 머리는 마치 앵앵거리는 파리처럼 떨렸고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발정 난 전자음 같았으며 소용돌이와 같은 사운드와 소음의 파워는 절정에 이르면서 폭발하는 하나의 로켓 같았다. ” “그것은 허무주의 속에서 으르렁거리는 야수의 포효였다. ” “리포터들은 이 추잡하고 괴물 같은 10대 청소년들이 모든 전통적인 음악적 질서가 파괴된 사운드 속에서 그리고 모든 것이 해체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세대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이렇게 커다란 버섯 같은 머리를 한 이 청년들이 바로 비트족, 힙스터 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10대 청소년들은 백인 음악, 사회를 기계적인 삶에서 발생한 고통을 무디게 만드는 아스피린처럼 영혼 없는 노래라고 치부했어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척 베리라든가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로큰롤의 비주류, 비대중적인 것이 어떻게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왔는지 느낌이 오시죠? 엘비스는 우울하고 소외된 10대들의 매혹적인 가수로 등극했는데요. 이때 그런 자기 파괴적인 미학의 상징으로 꼽히는 제임스 딘과 함께 반항하는 10대의 아바타가 된 것이 바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입니다. 여기서 엘비스의 하체 춤은 성적 매력을 무기로 삼은 흑인적 표현성, 안방의 공격자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는데요. 사실 그 아주 유명한 미국의 에드 설리번 쇼에서 엘비스의 하체 춤은 백인 기성세대들에게는 모욕적인 행위로 취급되어서 상체만 방송되었던 유명한 사실들을 여러분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로큰롤은 기성세대들에게는 미국적 생활 방식, 안정된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프리재즈의 등장 배경과 특징

프리재즈의 등장 배경과 특징
프리재즈의 등장 배경과 특징

1950년대 후반에 생겨난 '프리재즈'는 이름 그대로 모든 전통적인 규칙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즉흥적인 재즈 연주 방식을 말합니다. 조성이나 박자와 같은 모든 형식적인 면에 구애받지 않고 연주자의 느낌이나 감정에 충실해서 즉흥적으로 표현해낸 재즈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연주를 통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보니까 미국 내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 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재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음악으로, 개인의 의도를 담은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원래 재즈란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핵심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비밥이 등장하면서 코드, 멜로디, 화성 등 어렵고 복잡한 기술들이 생겨 나면서 재즈도 그런 문법들에 갇히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게 되자 여기서 벗어나서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을 하고 싶은 열망이 새롭게 생겨났는데요.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음악이 바로 프리재즈입니다.

프리재즈의 특징

음악의 소리와 소음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이국적인 악기를 사용한다거나 즉흥적이고 거친 성향을 띠는 아프리카 음악의 요소들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바로 이 프리재즈의 특징이라고들 말하는데요. 여기에는 오넷 콜맨, 세실 테일러, 존 콜트레인, 이런 사람들이 프리재즈의 대표 주자로 거론될 수 있습니다. 1959년 존 콜트레인의 앨범 Giant Steps는 엄청난 코드 변화와 즉흥연주를 통해서 화성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들 평가하는데요. 다양한 시도를 거듭해 왔던 재즈가 한계를 느끼게 되면서 보다 전위적이고 예술성이 높은 새로운 연주법을 시도한 것이 바로 프리재즈입니다. 프리재즈는 연주자가 그 곡의 구조와 솔로를 다 만들기 때문에 모든 것이 연주자의 즉흥 연주에 기댈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연주자에 따라 개성이 강한 매우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죠. 더군다나 1960년대 미국은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또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운동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사회적인 변동이 크게 일어났던 시기였던 데다 청년들 사이에서 록이 크게 유행하면서 재즈가 설 자리를 점점 잃게 되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사실 1920~30년대 라디오 매체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곡들은 전부 재즈였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그야말로 당대 최고 스타였습니다. 더욱이 스윙의 시대를 재즈가 점령하게 되면서 당시 사람들은 대중음악은 재즈가 전부였습니다. 클래식에 비해 자유롭고 활기찬 스윙 재즈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TV가 등장하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로 대표되는 로큰롤이 미국 대중음악계를 점령해가자 재즈는 대중음악 씬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요. 현재까지 재즈는 록과 힙합을 비롯해서 많은 대중음악 장르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즈는 늘 새로운 시도를 거듭해왔던 장르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재즈는 여전히 진화하고 있습니다.

프리재즈의 창시자 - 오넷 콜맨

프리재즈의 첫 장에는 알토 색소폰 연주자 오넷 콜맨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오넷 콜맨은 프리재즈의 창시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프리재즈라는 명칭도 1960년에 발매한 오넷 콜맨의 앨범 Free Jazz의 제목에서 유래한 것인데요. 역시 프리 재즈답게 즉흥연주에 의하여 자기 스타일을 완성한 앨범이 바로 이 프리재즈입니다. 너무 연주자의 개성이 강하고 잘 들리지 않아서 프리재즈는 비밥이 그랬던 것처럼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Giant Step 곡은 색소폰을 통해 재즈가 펼칠 수 있는 연주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 놓으면서 비밥의 한계를 넘어선 획기적인 시도라고도 평가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프리재즈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해갔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반면 이 시기에 등장한 록 장르의 대인기는 또 다른 재즈의 실험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퓨전 재즈의 등장과 역사

퓨전 재즈의 등장과 역사
퓨전 재즈의 등장과 역사

70년대에 등장한 퓨전 재즈가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퓨전 재즈는 이렇게 악기들이 다양해지고 연주 기술과 음향기기들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락과 재즈가 결합하는 움직임을 만들었습니다. 70년대는 록의 전성기였던 만큼 재즈 뮤지션들도 자연스럽게 록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또 그것을 재즈 장르와 결합하려는 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록 외에도 블루스나 클래식, 힙합까지 여러 장르를 넘나들면서 광범위한 음악 형식과 조화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프리재즈보다는 듣기 편하고 얼마든지 대중적인 곡을 만들 수도 있는 장점이 있었죠. 웨더 리포트, 칙 코리아, 허비 행콕, 키스 자렛 등이 퓨전 재즈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데요. 록과 재즈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재즈 록 퓨전'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또 쿨 재즈와 하드밥의 대표 주자인 마일즈 데이비스 역시 그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뮤지션들과 함께 새로운 퓨전 재즈 그룹을 만들어서 퓨전 재즈의 길을 개척하기도 했죠. 1960년대 후반 마일스 데이비스가 정통 재즈에 록을 결합해서 만든 '재즈 록'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이 퓨전 재즈는요. 록에서 사용되는 전기기타라든가 신시사이저 등과 같은 전자 음향을 도입한다거나 최근에는 라틴뮤직이나 인도 음악과 같은 민속음악을 결합하는 경향도 생겨났습니다. 퓨전 재즈는 1970년에 나온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Bitches Brew에서 최초로 도입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런 점에서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 음반을 통해 재즈와 락을 접목해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린 시도를 처음으로 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재즈와 록 음악을 혼합하여 '재즈 록 퓨전'이라는 장르를 고안해낸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마일스 데이비스를 현대 퓨전 재즈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보는 것입니다. 퓨전 재즈 이전의 프리재즈가 가진 실험성이라든가 독창성에 대한 시도는 퓨전 재즈가 등장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마일스 데이비스의 초기 재즈 록 퓨전에 이런 프리재즈의 요소가 강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리재즈가 너무 난해한 사운드였던 탓에 일반인이 듣기에는 어려운 음악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재즈의 침체기와 함께 락의 급부상은 재즈와 락의 결합을 통해서 대중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시도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음도 간과할 수가 없겠죠. 실제로 퓨전 재즈는 재즈를 대중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또 더 나아가 재즈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음악 스타일이 혼합되는 퓨전 즉, 크로스오버 장르를 정착시키게 된 계기로도 작용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일스 데이비스는 쿨 재즈와 하드 밥, 퓨전 재즈에 이르기까지 재즈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혹자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내놓은 앨범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시도였다고 도 평가합니다.

퓨전 재즈의 대표곡

1977년에 발매된 웨더 리포트의 'Heavy Weather'라는 곡입니다. 웨더 리포트의 Heavy Weather는 탄탄한 구성으로 강한 집중력이 느껴지는 테마를 갖고 있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귀에도 잘 들리는 사운드를 갖고 있죠.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식의 음악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그때는 매우 새로운 테크닉이 활용된 음악으로 간주되었고요. 또 신세대적 감각을 표방한 앨범으로도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퓨전 재즈로서는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곡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재즈 록 뮤지션들도 자주 이 곡을 자신들의 커버 곡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웨더 리포트와 함께 또 다른 레전더리 퓨전재즈퓨전 재즈 밴드는 바로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가 이끄는 '리턴 투 포에버'입니다. 칙 코리아는 한국에서 많은 팬을 거닐고 있어서 내한 공연도 자주 한 적이 있는데요. 칙 코리아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녹음에도 자주 참여하는 등 퓨전 재즈계의 키보디스트의 대표 주자로 꼽힙니다. 1972년 마일스 데이비스로부터 독립해서 칙 코리아가 리더가 되어 결성한 밴드가 바로 '리턴 투 포에버'인데요.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음악을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록과 펑크 뮤직을 섞어 자신들만의 독창성을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고들 평가합니다. 여기서는 칙 코리아의 앨범 <리턴 투 포에버>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Spain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다음에는 1976년 팻 메스니의 앨범 를 들어보려고 하는데요. 이 앨범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3연패를 달성한 팻 메스니의 데뷔 앨범인데요. 아마도 지금까지 들어본 퓨전 재즈 곡 중에서도 우리 귀에 가장 듣기 편한 사운드가 아닐까 싶습니다. 팻 매스니 역시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많은 재즈 뮤지션 중의 하나이죠. 이 앨범 역시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앨범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퓨전 재즈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앨범이기도 합니다. 1960~70년대는 록의 전성기였죠. 록의 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재즈 뮤지션들이 느꼈을 위기감이라든가 당혹감이 어떤 것이었을까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통 재즈로 회귀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시도가 대중을 사로잡을 수도 없을 것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들이 느꼈을 당혹감이 어떤 것이었을까, 여러분도 짐작이 되실 것 같은데요.

락과 재즈의 퓨전

잘 알려졌다시피 록은 흑인 음악의 요소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백인의 주류 음악입니다. 그런 점에서 재즈가 록과 결합한다는 시도는 재즈계 내부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번에도 과감하게 적과의 동침을 선언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퓨전 재즈라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던 것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수용한 현실적인 선택이었고 또 그만큼 과감한 시도였습니다. 대중음악의 진화 과정은 이렇게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고요. 또 그 경로에서 내부의 갈등과 외부의 변화 속에서 과감한 선택과 도전을 감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새롭고 과감한 도전과 시험의 자리에는 언제나 청년들이 존재했습니다. 대중음악의 주체가 청년들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에는 항상 바로 이런 힘겨운 과정들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쿨 재즈의 역사와 비밥 재즈와의 비교

쿨 재즈의 역사와 비밥 재즈와의 비교
쿨 재즈의 역사와 비밥 재즈와의 비교

초기 스윙재즈가 많은 청년들이 다 함께 모여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었다면 1940년대 등장한 비밥은 연주자 중심의 개성 있는 즉흥연주로 큰 발전을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연주자 개인의 개성과 예술성이 강해질수록 대중성은 떨어지기 마련이죠. 우리가 클래식보다는 락이나 팝을 더 선호하고 그것이 듣기에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연주의 테크닉과 예술성이 강해지면서 당시의 대중도 재즈는 듣기 어렵다고 생각했고요. 그것은 감상의 기회가 축소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지만 재즈 뮤지션들은 비밥이 갖고 있는 그 예술적 감각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듣기에도 편하고 멋진 재즈로 대중을 사로잡기를 원했는데요. 그것이 바로 쿨 재즈입니다. 빠른 템포의 격렬하고 거친 김밥에 반해서 소재지는 좀 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어서 쿨 재즈를 들으면 음 하나하나에 집중하면서 경청하게 '쿨'이라는 말 자체가 차갑다, 냉소적이다, 차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잖아요. 격정적이고 화려한 기교 위주였던 비밥에 비해서 유럽 클래식의 영향으로 인해 서정적이고 차분한 스타일의 연주를 쿨 재즈라고 보통 하는데 비밥이 미국 동부의 흑인 위주의 장르였다면 쿨 재즈는 미국 서부의 백인들이 주축이 되어 향유된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쿨재즈는 미국 서부 백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웨스트코스트 재즈'라고도 불립니다. 냉철한 느낌의 모던하고 세련된 멋이 풍기는 연주스타일을 '쿨'하다고 표현한 데서 나온 이름인 이 쿨재즈는요. 1950년대 이후 재즈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쿨재즈는 비밥의 바운더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많은 재즈 뮤지션들은 비밥과 쿨재즈를 함께 연주하기도 했고요. 또 그만큼 찰리 파커의 비밥은 연주자들의 음악적 도전을 끊임없이 자극했다고 볼 수 있겠죠. 반면에 쿨재즈는 비밥의 난해함에 지쳐 있던 대중과의 소통을 이끌어냈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쿨재즈를 들으면서 재즈의 매력에 빠지고 재즈에 입문하게 되었는데요. 그만큼 쿨재즈는 비밥에 비해 상쾌하고 깔끔하며 감성적이고 세련된 이지적인 느낌을 줍니다. 이런 점들이 대중에게 통했던 것이죠. 쿨재즈는 비밥 스타일의 복잡한 코드 체인지에 비해서 보다 심플해진 연주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데요. 비밥과 쿨은 반대의 사조라고 보기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서로 다른 스타일이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쿨 재즈의 대표곡

첫 번째 곡은 Dave Brubeck의 'Take Five'이고요. 두 번째 곡은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이라는 곡인데요. 이 두 곡은 비밥 재즈의 화려한 연주 테크닉보다는 조금 듣기 편한 감상곡이라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곡은 쿨재즈의 대표곡으로 꼽히는데요. 비밥의 난해함을 자제하고 단순하게 연주하면서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첫 번째 곡인 Dave Brubeck의 'Take Five'는 피아노와 색소폰 선율이 아주 잘 어울리면서 귀에 쏙쏙 잘 들어옵니다. 두 번째 곡은 트럼펫터인 쳇 베이커는 백인 청년인데 미성의 목소리가 굉장히 고혹적으로 들리죠. 비밥의 화려한 테크닉에 비할 때 이 곡은 마치 팝처럼 잘 들리는 장점이 있는 데다가 또 잘생긴 외모 때문에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고 불리면서 팬들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쳇 베이커의 전기영화 '본 투비 블루'가 개봉한 적이 있었는데요. 평생을 마약 중독으로 살다가 198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머물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화가 있는데 그래서 재즈광 중의 한 사람인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노래에서는 청춘의 냄새가 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쿨재즈의 첫출발은 1930년대에 활동했던 레스터 영으로 보기도 하지만요. 사실 본격적인 시작은 비밥의 대표 연주자이기도 했던 마일스 데이비스가 1949년에 발표한 전설적인 앨범 'Birth Of Cool'을 시작으로 봅니다. 일반적으로 1948년에 마일즈 데이비스가 결성한 9인조 밴드에서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죠.

비밥재즈과 쿨 재즈의 비교

보통 비밥과 쿨 재즈의 연주 방식을 두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요. 쿨 재즈는 비밥의 양상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비밥과 쿨 재즈가 전혀 다른 분위기로 느껴지기 때문에 다른 장르라고도 이해할 수도 있는데요. 강렬한 음색보다는 차분한 음색을 지녔을 뿐 리듬이나 화성은 비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비밥이 템포가 빠르고, 16분 음표의 빠르고 난해한 연주를 하는 데 비해서 쿨 재즈는 템포가 느리고 8분음표의 정제된 코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사운드가 다르게 들리는데요. 또 쿨재즈는 연주자의 개인적 실력보다는 밴드의 사운드 조화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의 연주는 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절제된 연주입니다. 실제로 쿨 재즈를 연주하던 뮤지션들은 비밥과 쿨을 오가며 연주하기도 했고요. 때로는 쿨과 비밥이 적절히 섞인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쿨재즈는 비밥을 기본으로 하면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서부지역 출신 뮤지션들의 스타일로 차분하고 절제된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역사와 하드밥 등장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역사와 하드밥 등장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 재즈 역사와 하드밥 등장

쿨 재즈의 선도자로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첫 장에 위치할 것입니다. 1949년에 발표한 앨범 'Birth Of Cool'의 제목은 마일스 데이비스가 쿨 재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상징하게 해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트럼펫 연주자였던 마일즈 데이비스는 어린 시절에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가 있었던 그런 비밥 선배들과 함께 연주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쌓아갔는데요. 마일즈 데이비스는 보통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대다수의 흑인 뮤지션들과 달리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가 농장에 투자한 덕분에 돈을 모을 수 있었고요. 또 아버지가 치과의사였기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10대 때부터 트럼펫 연습을 하기 시작했고요. 또 18세 때는 그가 살고 있었던 세인트루이스에 찰리 파커가 연주하러 왔을 때 우연히 찰리와 연주하게 되면서 재즈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버지의 반대를 예상하고 당시 재즈의 중심지였던 뉴욕에 가기 위한 방편으로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하겠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승낙을 얻고 뉴욕으로 건너갑니다. 처음에는 줄리어드에서 클래식을 배웠지만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업을 그만두고 찰리 파커와 함께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마일즈 데이비스 역시 비밥에서부터 커리어를 쌓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후 마일스 데이비스는 1948년 편곡가인 길 에반스와 만나게 되면서 또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를 열망하게 되었고 그때 9인조 밴드를 스스로 모아서 만든 앨범이 바로 'Birth of Cool, 쿨의 탄생이라는 앨범이었습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콜레트럴'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이 영화에 마일즈 데이비스와 찰리 파커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언급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킬러인데 킬러 빈센트가 재즈 뮤지션을 죽이기 위해서 한 클럽에 찾아오는 장면이 있어요. 킬러가 그 흑인 재즈 뮤지션을 죽이려는 순간 그가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하면 살려주겠다고 협상을 합니다. 킬러의 질문은 '마일즈 데이브스가 어디서 음악을 배웠지?'라고 묻는데요. 그러자 재즈 뮤지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는 치과의사로 세인트루이스 동부에서 농업에 투자해 많은 돈을 벌었고, 마일즈를 줄리어드 음대에 보냈소, 1945년에 뉴욕으로. ” 정답이죠? 그런데 빈센트는 그를 곧바로 총으로 쏜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1년도 안 돼 줄리어드를 중퇴하고 52번가의 찰리 파커를 찾아가 3년간 지도를 받았지. ” 킬러는 재즈 뮤지션이 틀린 답을 했어도 죽였겠지만 이들의 대화는 쿨 재즈를 개척한 위대한 뮤지션이었던 마일즈 데이비스가 비밥의 전설인 찰리 파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줄리어드에서 접했던 클래식을 재즈에 반영하는 등 실험적인 유형의 새로운 연주법을 도입했다는 내용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Birth of Cool -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Birth of Cool, 쿨의 탄생이라는 이 앨범은 쿨 재즈의 개념이 최초로 정리된 앨범이자 또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됩니다. 음악적인 완성도에 있어 최고로 평가받는 마일스의 대표적 역작이 된 앨범이기도 한데요. 그 외에도 Kind of Blue라는 앨범은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1순위에 꼽히고 현재까지도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음반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이 앨범의 수록된 곡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이 아마도 Blue in Green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 곡은 비 오는 날 혼자 듣는 감성적인 재즈곡으로도 손꼽히고 있습니다. Blue in Green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절친이었던 빌 에반스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지금은 공동 작업한 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이 연주한 Blue in Green을 들어보면서 한번 비교를 해본다면 이 두 사람의 스타일이 어떻게 다른지 느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곡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Blue in Green이고요. 두 번째 곡은 빌 에반스가 연주하는 Blue in Green입니다. 한번 서로 비교해 보시죠.

비밥 재즈, 하드밥 재즈

비밥의 계보를 이은 또 다른 장르의 재즈로 쿨 재즈가 유행했던 1950년대 중반에 하드밥이라는 재즈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재즈의 분화를 살펴볼 때 보통 뉴올리언스 재즈, 딕시랜드 재즈, 스윙 재즈, 비밥, 쿨 재즈, 이렇게 분류하기는 하지만요. 사실 쿨 재즈와 하드밥은 비밥에 그 기원을 둔 동시대의 재즈입니다. 즉 쿨 재즈 다음에 등장한 것이 하드밥이 아니라 쿨 재즈와 동시에 하드밥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하드밥은 쿨한 형식이나 클래식을 접목시킨 형식적인 면에서는 쿨 재즈와 비슷하고요. 또 사운드나 표현적인 면에서는 기존의 비밥 스타일처럼 폭발적이고 거친 성향을 드러냅니다. 이 때문에 쿨 재즈는 백인적이라고 이야기하고 하드밥은 흑인적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래서 지역적으로는 미국 서부 쪽은 쿨 재즈, 동부 쪽은 하드밥으로 구분하기도 하면서 쿨 재즈는 웨스트코스트 재즈, 또 하드밥은 이스트코스트 재즈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드밥이라는 이름은 '하드'라는 말처럼 비밥보다 무거운 음악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데요. 실제로 비밥의 빠르고 격렬한 연주에 비해서 다소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비밥보다는 명확한 점이 있어서 오히려 듣기 편한 면도 있죠. 그러니까 하드밥은 비밥에서 조금 더 업그레이드되면서 모던해지고 쿨해진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밥이 하드밥으로 진화하면서 재즈 드럼의 사운드가 부각되는데요. 찰리 파커의 비밥 연주와 클리포드 브라운의 하드밥 버전으로 같은 곡을 들어보면서 비교해 본다면 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Cherokee는 아메리칸 원주민 체로키 부족을 일컫는 말인데요. 비밥 연주자들에게는 필수적인 연습곡으로도 알려진 곡이어서 현재까지 수도 없이 많이 연주되는 재즈 스탠더드 넘버 곡입니다. 두 번째 곡인 클리포드 브라운 연주에서 드러머는 그 유명한 맥스 로치인데요. 1930년생인 클리포드 브라운은 1956년 26세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자신의 연주에서 드럼은 항상 맥스 로치에게만 맡겼던 것으로 유명할 정도로 두 사람은 아주 절친이었습니다. 앞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를 쿨 재즈의 창시자라고 했는데요. 사실 마일즈 데이비스는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해서 재즈 장르의 모든 것을 섭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앞서 9인조 밴드를 이끌면서 쿨의 탄생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하드밥의 출발에서도 많은 기여를 했던 인물입니다. 1957년의 앨범 Bags Groove는 당시 쟁쟁한 연주자들 5명으로 구성된 밴드와 함께 하드밥의 포문을 열었다는 앨범으로 평가됩니다. 이 앨범은 앨범 4장 분량 정도 되는 곡들을 이틀에 걸쳐 원테이크로 녹음했다고 해서 이른바 '마라톤 세션'으로 불리며 또 하나의 재즈계의 전설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스윙 재즈의 등장 배경과 변화 과정

스윙 재즈의 등장 배경과 변화 과정
스윙 재즈의 등장 배경과 변화 과정

1900년대 초에 뉴올리언스를 중심으로 초기 재즈가 생겨났다면,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부터는 뉴올리언스의 재즈 뮤지션들이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로 대거 이동하게 되면서 '스윙 재즈'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가 등장합니다. 1914~1917년까지 약 5년 동안 1차 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항구도시였던 뉴올리언스가 주요 해군기지로 지정되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스토리빌' 같은 향락업소들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던 많은 뮤지션이 일자리를 잃게 되자 이들 중에는 당시 공업도시로 발돋움해가던 북부 도시 쪽으로 올라가서 대규모의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증가했습니다. 재즈 뮤지션들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뉴올리언스나 그 주변의 미시시피 등지에서 태어나서 시카고나 뉴욕에서 대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것 역시 이러한 대이동을 경험했던 사정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다른 한편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북부 도시에서 군수산업이 발전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많은 일손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흑인 인구의 대이동이 또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 흑인의 총인구 약 천만 명 중 2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남부에서 북부로 또는 중서부의 도시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할렘 같은 대도시 빈민가에 모여 게토를 이루며 단체로 살아갔는데요. 이렇게 시작된 도시의 흑인 공동체 생활은 나중에 할렘 르네상스 탄생의 배경이 됩니다. 이때부터 루이 암스트롱, 킹 올리버, 키드 오리, 젤리 롤 모턴 같은 재즈 뮤지션들이 뉴올리언스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서 활동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시카고에서 새로운 연주법을 구사해서 '시카고 뉴올리언스 재즈' 스타일을 구축하게 됩니다. 초창기 뉴올리언스 재즈가 대도시 시카고로 거점을 옮기게 되면서 조금 더 새로운 스타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죠. 이때 시카고의 백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재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카고 재즈가 바로 스윙 재즈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스윙 재즈

스윙 재즈라는 말은 여러분에게도 낯설지 않은 말일 텐데요. 재즈 장르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스윙이죠. 스윙은 재즈에서 유연성과 박력과 풍부한 리듬을 보장해주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스윙은 규칙성 있는 예술에 감정과 주관성을 부여해 주었는데요. 재즈 뮤지션들이 자신의 음표에 자유로움을 불어넣을 때 바로 열쇠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스윙입니다. 시카고 재즈로 옮겨가면서 재즈가 2박자에서 4박자의 재즈로 바뀌는데요. 이때 두 번째와 네 번째 박에 강세를 두는 스윙감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스윙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을 든다면 두 번째와 네 번째 박자에 강세를 두는 '백비트'와 클래식의 오케스트라처럼 많은 연주자들이 모여서 다 함께 재즈 음악을 연주하는 '빅밴드'의 형태를 들 수 있을 텐데요. 이런 형태의 기틀을 확립한 인물이 바로 플레처 헨더슨과 루이 암스트롱이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콜맨 호킨스,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등이 가세하면서 스윙재즈의 시대가 본격화됩니다. 여기에 찰스턴 리듬을 기반으로 킥이라든가 바운스, 팔동작으로 구성된 '찰스턴 댄스'도 유행했는데요. 이후에도 스윙댄스의 분화 장르로도 유행하게 됩니다. 스윙댄스의 메인인 린디 합이라는 춤이 있고요. 또 지터벅, 한국에서 지루박이라고 발음하는 이 지터벅이 본격적인 유행댄스로 이전에 생겨난 장르였는데요. 한국에도 스윙댄스가 전파되면서 이런 찰스턴 댄스와 같이 댄스가 같이 수입되어서 지금은 국내에도 스윙댄스 관련 동호회, 클럽을 방문하면 이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린디 합이라는 것은 스윙 리듬에 맞춰 추는 사교댄스의 한 종류를 말하는데요. 1923년~28년 정도에 흑인들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한 춤입니다. 미국에서 생겨난 사교 재즈댄스 찰스턴의 그 격렬한 스텝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춤인데요. 대서양 무착륙 횡단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 당시에 대서양을 무착륙하고서 비행으로 횡단한 사람은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였는데 그만큼 인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 린드버그의 이름을 따서 린디 합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다음에 지터벅이라는 춤은 4분의 4박자의 경쾌하고 템포가 빠른 춤으로 한국에서는 지르박이라고도 합니다. '지터벅'이라는 이름은 1930년대 미국의 한 댄스홀에서 이 춤을 신경질적인 벌레, jittering bug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춤에서 생겨난 것이고요. 1930년대 말~194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아주 유행했던 댄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 병사들이 전 세계에 이 춤을 전파했고요. 또 한국에는 해방 이후에 보급되었습니다. 이렇게 린디 합이라든가 지터벅과 같은 화려하고 격렬한 스윙댄스가 스윙재즈의 유행과 결합하면서 스윙재즈의 인기를 더 극대화시켰죠. 이런 스윙재즈 시대의 화려함을 잘 재현해낸 영화가 바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영화화했던 위대한 개츠비와 뮤지컬 시카고가 있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분방한 시대적 분위기는 새로운 음악을 탄생시키기 마련인데요. 이 시기에 그것이 바로 재즈였던 것이죠.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재즈를 연주하는 대규모 밴드는 부자들의 파티에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1차 대전 참전 용사였던 개츠비가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최고급 저택을 마련하고 최고급 자동차와 패션으로 과거의 연인을 유혹하는 스토리는 '광란의 20년대'를 경험하는 미국 사회를 대변해주는 인물입니다. 또 영화 '시카고'는 재즈 시대 시카고의 유명인들의 스캔들과 부패한 사법제도를 다루고 있는 영화였죠. 이렇게 화려한 스윙 재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최고의 경제 호황기를 누렸던 미국의 경제 상황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소비주의와 재즈의 변화

1920년대는 처음으로 소비주의가 등장한 시기였는데요. 이때 냉장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전기난로 등 수많은 전자제품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시대에 해당합니다. 1920년대 미국 사회의 소비주의가 마련된 사정을 보자면 지금 보아도 놀라울 정도인데요. 1차 대전 시기 무기와 군수물자를 유럽에 팔아서 거대한 수익을 거둬들였던 미국의 경제적 상황을 바탕으로 자동차의 대량 생산과 라디오와 같은 전기제품들이 급격히 보급되었고 또 백화점이라든가 체인스토어 등이 생겨나면서 저렴한 물건들이 대중적 소비풍조를 형성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가정에 자동차와 전기제품 등이 보급되었던 것은 바로 대량 소비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풍경인데요. 이들의 풍족한 여가생활은 화려한 파티가 일상에 자리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 대체로 192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광란의 시대' '스윙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풍경에서 기인한 것이죠. 또 1920년대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미국 영화는 유럽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1차 대전으로 유럽 문화의 성장이 주춤하는 시기에 급속히 성장해서 1920년대 미국과 유럽 영화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대 초부터 미국 영화의 중심이 뉴욕과 시카고에서 서부의 캘리포니아 LA의 할리우드로 이동했는데요. 그 이유는 캘리포니아의 광대한 토지가 대도시보다 조금 쌌기 때문에 대규모 스튜디오가 자리하기에 비용 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파라마운트, 폭스 등 현재까지 미국 영화계의 주류 영화사들이 이 무렵에 할리우드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1920년대 할리우드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의 중심지가 되었고요. 또 미국 영화는 전 세계 영화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갔습니다. 이런 경제적 풍요는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는데요. 1920년대 자동차 회사들은 효율적인 생산 라인을 도입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저렴한 자동차를 팔 수 있는 판로를 구축하게 되었죠. 포드,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 등의 자동차 회사들 역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렇게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자동차의 원료 생산을 위한 철강업이라든가 가솔린 수요를 위한 석유산업, 도로건설을 위한 토목사업 등 교외에서 도시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택건설업 등 이런 무수한 주변 산업이 연이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해서 미국의 산업 생산이 60% 이상 증가했고 이것은 곧바로 기업 주식의 무한한 상승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920년대 미국 사회의 경제적 풍요는 대체로 1차 대전의 특수를 누렸기 때문이라고 평가되곤 하는데요. 전쟁이 끝나자 곧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발생하면서 풍요로웠던 경제 상황에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1929년 10월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을 Great Depression, 대공황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히피문화 의식과 외모적 특징

미국의 히피문화 의식과 외모적 특징
미국의 히피문화 의식과 외모적 특징

히피펌, 히피패션, 이런 말들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을텐데요. 아무래도 히피문화를 이야기할 때는 그 60년의 발발한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히피 문화와 베트남 전쟁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반문화, Counter culture라고도 하죠. 한국어로는 저항문화, 대항문화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요. 그럼 Counter culture는 본질적으로 청년들에게서 보이는 현상입니다. 잭 캐루악이나 앨런 긴즈버그와 같은 비트 세대들의 창조력과 상상력이 문학적인 특징이 있다면 히피의 반문화는 음악 지향적이라는 특징이 있죠. 일단 1945년 2차 대전 직후에는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출산율이 증가했습니다. 그래서 이때를 베이비붐 시대라고 하는데요. 2차 대전이 끝난 45년 이후, 46년부터 약 15년 정도 지속된 베이비붐으로 인해서 미국 인구는 급격히 많이지기도 했고 또 젊어지기도했습니다. 1960년에서 70년대까지 미국의 대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할 수 밖에 없죠. 이들이 한 20대 후반, 20대가 되는 시기가 바로 1960년 70년대까지니까요.

히피세대가 가진 문화의식

이 세대들이 어떤 특별한 문화 의식을 갖고 있는데요. 이 세대들은 유별난 동질 의식으로 거대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문화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을 히피라고 불렀는데요. 이 히피는 60년대 미국 경제의 고속 성장이 가져온 소비 사회에 비약적인 발전을 오히려 경계했던 세대들입니다. 보통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경제가 번영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생활이 안락해 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보통 일반상식으로 알고 있죠. 하지만 이 히피들은 그런 소비 사회가 가져다준 물질주의적 평온함 속에서는 인간성이 오히려 소외를 겪고, 돈이 주는 쾌락을 소비하게 될 뿐 인간성은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히피들은 그런 지배 문화, 기성 질서와 대결했던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로 이런 지배 문화와 대결했던 사람들은 주로 청년이라던가 학생, 지식인이 주류가 되죠. 이들은 대게 이상주의자들이었고요. 그리고 순응주의, 바깥에서 순응하지 않는 공간에서 절대적인 것을 탐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산층의 생활 양식, 중산층이 추구하는 어떤 양식들, 라이프 스타일들을 오히려 거부했죠. 이런 히피들은요. 히피들의 주 거주지는 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나 LA 등지에서 시작된 청년 문화들을 히피 문화라고 부르는데요. 이 히피들은 기성 사회 통념이라던가 질서, 제도, 가치관, 이런 것들은 억압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성 질서와 주류 체제, 가치관들을 부정하면서 인간 본성을 회복하고 자연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면서 사회에서 일탈하고자 하는 탈 사회적 행동을 운동으로 확대시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기성의 사회 통념이나 제도, 가치관, 이런 것들을 부정하고 인간 본성의 회복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것을 바로 운동으로 확산시켰다라고 이야기하는 건데요. 이들은 물질주의로 규정되는 부르주아 사회에 편승한 삶을 거부 하고요. 노동과 질서, 가족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중심적인 윤리, 미국이 중시하는 윤리보다는 오히려 무질서라든가 혼돈, 쾌락주의, 이런 걸 선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어떤 비판적인 관점은 정치적 문제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중산층의 생활 양식에 겨냥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질서에서 이탈한 비주류를 선택한 것을 대안적인 스타일이라고 생각했고, 음악이든 패션이든 문화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들을 계속 찾아 헤맸던 것 같습니다.

히피의 외모적 특징

히피의 외모의 특징적인 부분을 좀 보자면요. 남녀 모두 긴 머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것은 히피 공동체를 표시하는 상징이기도 했고요. 또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요구하는 부르주아의 생활 양식에 대한 저항의 표식이기도 했습니다. 또 의복을 보자면 굉장히 다채로운 색감을 가진 민속 의상이나 염색 직물 등에서 힌트를 얻은 좀 소박한 느낌의 동양풍, 에스닉 패션도 히피를 상징하는 패션이죠. 또 인디언들의 전통 의상인 가죽옷이라든가 아니면 긴 구슬 목걸이, 깃털 장식, 모카신, 헤어밴드 등을 즐겨 사용하기도 했고요. 인디언 장식에서 따온 얼굴에 꽃 그림을 그리는 등 다양한 형태로 외적 취향의 특수성을 고집했던 거 같습니다. 그 외에도요. 낡은 털 코트, 크레이프 드레스, 군인 외투 같은 약간 추레한 옷차림을 입기도 했는데요. 그런 소박한 옷차림은 일종의 부, 부자에 대한 경멸을 상징하고요. 맨발로 다니거나 아니면 샌들을 신거나 했는데, 그런 건 가난한 여행자의 어떤 소박한 삶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이 히피들은요. 학교나 가정, 도시에서 벗어나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서 전원생활을 실제로 실천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행동 양식들은 노동의 어떤 신성한 가치를 거부하고, 모든 물질들을 히피 공동체가 서로 함께 공유하면서 가난한 삶을 자처하고, 인간성 회복에 매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같은 것이 였어요. 히피들은 오히려 무소유와 자발적 가난에 근거한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반 자본주의적 삶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죠.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히피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기성 세대의 가치관에 반대하는 청년 세대의 대안적 삶을 모색해 갔다는 것을 눈치챌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원 공동체를 이룬 히피들은 때로는 마약을 매개로 해서 자연이 부여해 준다고 믿는 신비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와 거기에서의 공존을 추구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점을 볼 때 이들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조직된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함께 살면서 철학이나 심리학적인 궁금증들을 서로 논의해 보고 생각해 보는 사람들로 구성된 낙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사람들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가 있죠. 또 히피들의 복장에서는 청바지를 입은 것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요. 제임스 딘의 명성이 담긴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었던 히피들의 모습을 여러분도 많은 사진에서 봤을겁니다. 청바지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옷인데요. 먼저 청바지는 일단 과거의 금광을 찾아다니던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를 환기시키는 복장 이라는 의미도 있고요. 또 카우보이와 미국 서부의 광활한 땅이 연상되기도 하지요. 값도 싸고 질기기 때문에 검소한 생활 양식을 지향했던 히피들의 사상과 일치하는 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이런 보헤미안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적화된 옷이었습니다. 또 사회적 계층화와 권위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종의 민주주의적 색채를 지닌 옷이었다고 할까요? 그렇게 청바지는 반체제의 핵심적 가치인 자유를 상징하는 옷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피들은요. 자신들을 길러냈던 소비 사회의 안락함과 물질주의의 쾌락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집단 거주지의 형태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함께 인간적인 공동체 생활을 굉장히 선호했습니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거나 또 최소주의의 생활을 하면서 제 3세계의 사람들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빈곤한 사람들과의 연대의식을 강조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단 하나, 이들이 사치를 아까워하지 않는 하나의 소품이 있었어요. 단 하나의 소품은 바로 음질이 좋은 오디오 장치, 즉 하이파이 오디오 장비를 소중히 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반문화 운동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하죠. 그만큼 히피들은 음악을 듣는 것을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히피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happy한 사람들, 뭔가 행복해 보이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지만, 사실 60년대의 미국 사회적 분위기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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