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중 음악, 청년 문화, 로큰롤, 재즈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믈브리 2022. 7. 23. 16:44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 청년문화를 드러내는 비트 제너레이션

1950년대의 청년문화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흑인 인권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시기였죠. 사실 그 55년에 로자 파크스 사건 이래로 드디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흑인 인권 문제가 하나의 중요한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즐기는 음악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전례 없는 융합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분위기가 일고 있었죠. 이러한 백인과 흑인의 융합에 대해서 당당한 청년들의 선언들은 인종, 성, 사회적 체제에 대한 반역, 이런 것들을 소재로 한 논쟁을 대거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분위기에서 출현한 음악이 바로 로큰롤이었잖아요. 로큰롤의 출현과 관련된 이 징후들 중의 하나가 비트족과 힙스터 족에 대한 미국 기성세대의 격분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먼 메일러의 화이트 니그로, 미국의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은 자식들이 화이트 니그로가 되려고 하는 의도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분위기로 대응했었죠. 마찬가지로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도 어떤 흑인 문화에 대해서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 문화를 이상화하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의 문화였던 힙스터

이런 분위기에서 등장한 청년들의 문화 중의 하나가 바로 힙스터입니다. 사실 힙스터는 1940년대 흑인 재즈 뮤지션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종했던 소수의 백인, 중산층 청년들의 문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즘도 많이 쓰고 있는 말이죠, 힙스터라는 말은. 그런데 5~60년대의 힙스터라고 이야기하면 주로 재즈 뮤직에 열광하면서 일정한 거주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청년 그룹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1950년대의 힙스터들의 주 무대는 그리니치 빌리지와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 베리 구역을 주요 정착지로 정하면서 비트 세대, 비트닉을 부르는 말로 나중에 변하게 되죠. 그래서 사실 지금은 비트닉, 비트 제너레이션보다는 힙스터라는 말을 더 많이 쓰지만 사실 이 비트닉과 힙스터는 굉장히 유사한 청년 그룹이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주류 질서와 도덕에 반발하는 방랑자 문학, 예술가 집단이 생겨나는데요. 이 작가들은 자칭 자신들을 '패배자 집단'으로 불리면서 비트닉, 비트 제너레이션, 비트 세대를 형성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뉴욕이라든가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대도시에 모여 살면서 서로의 문학적 관심을 공유한 소수 작가 그룹으로 출발했는데요. 이런 비트 세대의 작가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잭 케루악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 사용 당시 비트 뜻

이 케루악이 처음 사용했다는 비트라는 어휘는 바로 2가지 뜻이 있는데요. 첫 번째 beaten-down, 즉 패배한, 짓밟힌이라는 뜻이 있고요. 이런 beaten-down이라는 의미는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고립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케루악의 시선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고요. 또 주류 사회에서 승리한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하는 감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패배자들은 외적, 사회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순수성, 사회에 성취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획득하고자 하는 문화적인 노력으로 발현됩니다. 그래서 가식이라든가 관습, 권태, 권위, 억압, 이런 위선을 상징하는 제도권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 비트닉들은 실존주의적 가치, 행동의 공허함, 허무주의적 태도를 내세우면서요. 기성의 모든 가치라든가 체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청교도 윤리보다는 어떤 동양의 종교라든가 동양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신비주의적 태도, 재즈, 시, 약물 주로 마리화나를 들 수 있는데요. 그리고 문학, 이런 것들의 예술적이고 신비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이런 것들에 가치를 두면서 반문화 공동체의 코드들을 마련한 세대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트닉들은 특히 비밥 재즈에 열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전에 40년대까지는 스윙 재즈가 주로 재즈의 절정을 몰고 갔었는데요. 스윙 재즈는 주로 댄스가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비밥 재즈는 굉장히 듣기 어렵고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청취, 감상용 재즈라고 할 수 있거든요. 스윙 재즈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에요. 스윙 재즈가 뭔가 몸을 많이 흔들어야 되는 댄스를 위한 재즈 뮤직이라면 비밥 재즈는 뭔가 고도화된 테크닉의 연주 감성들을 가지고 있는 재즈이기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듣고 있기에는 약간 조금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데 반면에 비밥 재즈의 어떤 심오한 세계, 신비주의적 세계, 문학이라든가 비주류의 어떤 감각, 이런 것들을 청년들이 매혹적인 것으로 느낄 수 있도록 문학적 가치까지 가미한 비트닉의 중요한 분위기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밥 재즈는 화성이 굉장히 확장돼 있고요. 또 리듬이 굉장히 불규칙하고 게다가 즉흥 연주의 자유로움, 악보가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들의 자유에 맡기는 음악이기 때문에 이전에 스윙 재즈에서 볼 수 있었던 규칙적인 연주 형식에서 벗어난 굉장히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재즈가 바로 비밥 재즈죠. 그래서 사실 비밥 재즈는 재즈사에서도 형식적인 음악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비트 세대 문학의 대표

이런 비밥 재즈를 좋아했던 비트 세대, 문학의 대표는 바로 앨런 긴즈버그를 들 수 있죠. 앨런 긴즈버그의 유명한 소설이 바로 Howl, 절규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Howl의 저자인 앨런 긴즈버그와 길 위에서의 작가 잭 캐루악, 네이키드 런치의 작가 윌리엄 버로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네이키드 런치는 영화로도 제작이 되어있죠.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미국 사회를 거대한 관료주의의 독점, 경찰국가적인 전체주의의 집단이라고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의 어떤 딱딱한 도덕률 그리고 억압된 관료주의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이런 것을 비판한 긴즈버그의 Howl이라는 작품은요. 비밥의 즉흥 연주 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까지 이야기할 정도로 자유와 파격적인 문학 작품입니다. 잭 캐루악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는 길 위에서는요. 빈민층의 어떤 살아있는 생생한 어법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윌리엄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이런 작품도 30년대 초반, 뉴욕을 여행하다가 우연히가 아닌 의도적으로 갱스터 세계에 뛰어들어서 심각한 헤로인 중독자가 되는 주인공들을 작품에서 등장시키고도 있습니다. 비트닉은 이런 개인주의적 면모로 집단을 유지한 예술가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보헤미안적인 허무주의, 쿨 재즈, 마리화나, 선불교와 같은 동양 신비주의를 자신들의 사상과 혼합해서 굉장히 독특한 문학을 선보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보면 70년대 히피문화가 떠오르죠? 바로 이 비트닉이 70년대에 가면 히피문화의 중요한 어떤 소재들이 되는 거죠. 이런 적극적 방랑을 택한 소수의 집단적인 자기 도피를 꿈꿔왔던 청년들이요.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라 가장 어둡고 낮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운둔하면서 이런 미국의 어떤 체제를 지우고 그 체제에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선택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어떤 루저의 문명, 루저의 삶을 택한 사람들인 거죠. 이들은 중산층적 삶의 무력함 또는 폐쇄적인 실존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한 청년 그룹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 이런 빈곤 속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는 흑인들은 급진적인 백인 지식인들에게 막혀 있던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비트닉을 추구하던 청년들의 모습에서도 화이트 니그로의 모습이 떠오르죠.